2026년 8월30일 연중 제 22 주일 Fr. 김두진(바오로)강론

8월 30일 연중 제22 주일

지난주일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은 베드로 사도였다. 인간적으로는 가문의 영광이요, 가족들이나 친지들, 고향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마음껏 대놓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인데,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참느라 고생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류한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따뜻한 충신 모드였던 베드로에게 돌아온 예수님의 답변은 칼바람보다 더 매섭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베드로는 순수한 애정으로 말했지만, 신학적으로는 ‘십자가 없는 메시아’를 요구하고 있었다. 고통과 죽음을 피하고 승리만 취하려는 인간의 상식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전면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안위와 세속적 메시아 관을 우선시한 인간적 신앙의 한계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예수님의 말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Get behind me Satan)에서 ‘사탄(Satan)’은 히브리어로 ‘적대자, 방해자’를 뜻한다. 베드로 개인을 악마라 비난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회피하게 만드는 유혹의 출처’를 사탄의 공작으로 보신 것이다. 특히 “Get behind me(내 뒤로 물러가라)”는 그리스어로 제자가 스승을 따를 때 쓰는 표현이다. 스승의 길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스승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위치’로 돌아오라는 준엄한 재정립이다. 천국 열쇠를 받은 구원의 반석(베드로)이, 한순간에 예수님을 죄와 죽음의 함정에 빠뜨리려는 가장 위험한 걸림돌로 반전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은 어떻게 고통을 피하고 자기 생명을 지킬 것인가’에 집착하지만, 하느님의 생각은 ‘어떻게 자신을 바쳐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로 향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은 파멸이지만,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죄를 없애는 사랑의 완성이다.

사실 교회사 안에서도 이 ‘사람의 일’에 눈이 어두워 대형 사고를 친 역사가 수두룩하다. 천국 열쇠를 쥔 교황들이 명분 없는 전쟁에 십자군을 징집해 이교도를 학살하는 것을 용인했고, 지동설을 주장한 조르다노 브루노 수사를 로마 한복판에서 화형 시켰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압박해 골방에 가두었다.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겨 여자가 남장을 했다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한 것 역시 정치적 계산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한 사람의 일이었다. 문제는 우리 역시 베드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명문대 진학, 억대 연봉, 건강, 확실한 노후 대책. 세속의 공식으로는 이것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니 스스로 가진 것을 내려놓고 죽으러 가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적당히 타협하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두 길은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자아로 똘똘 뭉쳐 자기 안위만 챙기려는 상태에서는 십자가란 그저 성가신 짐 덩어리일 뿐이다.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고통과 나약함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데, 신앙인은 매일 자아와 십자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 둘 다 손에 쥐고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는 미지근한 제자는 존재할 수 없다.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를 보자.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 이건 거의 하소연을 넘어선 항의다. 하느님 말씀대로 살았더니 돌아오는 건 조롱과 치욕뿐. 억울해서 “다시는 주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버텨보지만, 속에서 불길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다. 십자가는 피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세속적 욕망을 거슬러 오르는 불꽃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사람의 일’이라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도 바오로는 간단한 시선 전환을 제안한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십시오.”(로마 12,2) 카메라 렌즈를 나에게 맞추면 여전히 세속의 불안에 시달리지만, 렌즈를 하느님께 고정하면 내가 지고 있는 짐이 ‘하느님의 일’을 향한 동반의 과정임을 알게 된다.

원래 십자가는 치욕과 수치의 사형 틀이다. 베드로가 펄쩍 뛴 것도,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쫄거나 주춤하는 자신을 너무 자책하지 말자. 억지로라도 그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자신을 오히려 칭찬하고 위로해 줄 일이다. 힘들면 예레미야처럼 하느님께 징징거려도 괜찮다. 예수님조차 시몬의 도움이 필요했을 만큼 십자가는 원래 무거운 법이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면 내 삶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내 방식의 ‘사람의 일’을 내려놓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세속의 계산기를 던져버리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그 길 위에, 하느님이 준비해 두신 진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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