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 또 싱그러운 제일 좋은 시절, 5 월의 저녁에
우리는 모두 모여와 함께 성모성월을 노래하고 또 찬미드렸다.
성모의 밤 행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를 낳아서 키워준 엄마, 그리고 우리모두의 거룩하신 엄마, 성모마리아를 기려보았다.
( 순결 )
요즘에는 순결( 純潔)에 대한 그 개념 자체가 많이 변질이되고 왜곡되어있다는 느낌이지마는 하느님이 가브리엘천사를 외딴 시골마을
나자렛으로 보내시어 아직 앳띤 처녀 마리아를 인류 모두의 어머니로 간택하셨을 때 어쩌면 마리아의 순결함을 택하셨던 게
아니였을까 짐작해 본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순결은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깨끗하며 마음에 사리사욕이나 사념(邪念) 따위가 없음)이라 하였다.
순결의 영어 뜻을 보면 (Purity) 와 (Virginity)가 다 포함되는 것 같다.
오래도록 동방의 한 예의바른 나라로 지칭되어온 현대한국을 기준으로 삼을 때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생이 될 쯤에는 그 절반이상이 육체적 성경험을 하였다고 통계가 말하고 있다.
이 통계숫자는 아직 젊은이들의 절반만이라도 혼인하기까지 순결(정절, Virginity)을 지켜나가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승락아래 결혼을 약속한 남녀들만의 만남이 젊은이들의 만남풍조가 이닌지는 오래전의 전설처럼만 남아있는
현실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나보기 쉽지않을 육신적 순결(Virginity)은 물론 고귀한 것이지만 그것은 아직 정절을 지킨 외적 표징일뿐이며 완전한 순결을
위해서는 마음의 순결(Purity)도 함께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참 순결을 지니고 살았을수도 있을 다른 많은 처녀들중에서 시골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하느님께도 얼마나 티없고 하자없으셨기에 그분을 찾아가도록 하셨을까?
그래서 그분은 거룩한 어머니(성모)라 불리워지며 우리의 공경과 추앙을 받아 마땅하실 것이다.
( 밀물과 썰물)
중학생 때 쌀 한자루와 담요 한장씩 들고 몇이서 충청도 안면도에 방학숙제 대신 모기와 싸우러 간 일이 있었다.
그곳에선 아이들과 한참 뛰어놀다 보면 바닷물이 바로 곁까지 와 찼다가는 어느새 또 저만치 밀려가 있는 밀물, 썰물의 현상을 보고
희한하게 여긴적이 있다.
그저 희한했지 왜 그런지를 개학하고 돌아와 물리학 선생님께 묻고 그것을 쳐다보며 연구하느라 방학숙제를 깜빡 잊었노라 했지만
선생님은 그런 얄팍한 잔재주에 넘어가지는 않고 그러나 자세히 질문에 답은 해 주었었다.
달과 태양의 끌어당기려는 힘과 달과 지구가 회전운동할 때 그 원심력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라 했다.
숙제를 안한 죄로 벌은 섰지만 그 답으로 개학한 날 나는 상당히 유식해져 있었다.
잠깐.
난 무엇을 말하려다 지금 방학숙제 안한 고백하느라 얘기가 빗나갔을까.
아 참.
요즘 타락의 벼랑으로 치닷고 있는 대학생들은 왜 그렇게 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고 있는 걸까? 그거였던 거 같네.
옛 중국 현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은 선한마음을 갖고 태어났을테지만(성선설) 또 한편 살인을 할 만큼 악한 생각도
어렵지않게 갖을 소질이 있는 것 같다.(성악설)
아마도 생각하길,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과 그 유혹을 물리치고 벗어나려는 양심 사이에서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들락날락, 갈팡질팡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그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이유를 너무 많이 노출되어있는 각종 미디아, 세상풍조, 흐름들 이런 외적요소에다 내밀고 책임회피와
자기합리화를 꾀하는 건 아닐까?
나의 양심과 의지는 무거워서 외출할 때 집에다 두고 나가는가?
마리아는 시골마을에 사셨기 때문에 지금의 도회지 젊은이들처럼 유혹에서 멀리 계셨을까?
물론 환경을 무시해서도 안되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내안의 의지일 것이다.
시골이거나 높은 담장안의 수도원.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도 (나)의 마음이 무너지면 환경에 구애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무너지는 사건은 반드시 엄청난 큰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견고한 축대도 담장도, 어떤 건축물도 무너지려면 작은 쥐구멍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엄마와 고추잠자리)
성모님을 기리다 보니 나를 낳아서 키워준 나의 엄마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내곁에 함께할 수 없으니 아마도 더 그리워지겠지요.
나의 엄마도 세례명으로 마리아를 선택하였습니다.
아마 성모님처럼 그렇게 삶을 순결하게 꾸리며 따라 살고 싶으셨겠지요.
그리고는 날 뱃속에 있을때 이미 주님을 만나게 해 주었지요.
그런데도,
나는 어렸을 때도 자라서 청년의 티가 날즈음 까지도 고추잠자리 같았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청개구리였을지도 모르지요.
자꾸만 따스한 엄마의 울타리를 벗어나 날아보려고 했고 오른쪽으로 가라하면 궂이 왼쪽으로 그렇게 부끄러운 자식이었다는
때늦은 후회에 눈시울을 적시곤 하지요.
그러면 엄마는 나의 손목을 실로 묶어 날고싶어도 묶인 실의 길이보다는 더는 멀리 못날아가도록 했습니다.
놀기좋아해서 때론 불량학생들과 어우러져 놀아도 왠지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 눈에 안보이는 힘이 나쁜 유혹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였습니다.
그땐 자신의 의지인가 했지만 밖으로부터 오는 어떤 힘이 분명했습니다.
나의 손목을 묶은 그 실은 바로 엄마의 기도였습니다.
못난이같은 자식이었지만 늘 지켜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또 성모님께 간곡한 기도를 하셔서 멀리 날지는 못하도록 실처럼 나를 묶어
그기도의 힘이 나를 위험으로부터, 유혹으로부터 지켜준 힘이 됐었다고 확신합니다.
나와 나의 엄마, 개인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지만 실은
우리 함께하는 공동체의 모든 엄마에게 하고픈 말이지요.
(엄마의 기도)는 얼마나 위대한지요.
내 남편을 위해, 내자식을 위해, 내엄마를 위해 또 내아빠를 위해 그리고 미사때마다 내형제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내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한다면 수지맞는 장사일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내가 바치는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 그리고 마리아께서 도로 갚아 나에게 주실 것이니까요.
아니 그냥 갚아만 주시겠습니까?
몇배나 더 보태서 듬뿍 축복으로 갚아주신다 하셨잖아요?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를 (셈)을 잘하는 우리가 왜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