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1 사건이 주는 교훈)
TV에서는
테러리스트가 탄 비행기의 공격을 받고 세계무역센터가 불타는 장면을 시작으로 악몽같은 그날의 일들을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자욱해진 연기와 그 열기로 더이상은 견딜 수없게 됐을 어떤이가 수십층 꼭대기의 창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카메라는 끝까지
추적하며 그이가 무참하게 죽어가는 잔인한 생중계의 취재는 누구일지 알 수도없을 그이의 가족들의 아픔이 찡하게 전해오며
그 육즁한 건물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없어 끄고 말았다.
과연
그 사건이 우리에게 줄 수있을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 가해자인 테러리스트는 중동지역의 분쟁에서 아랍인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 언제나 이스라엘의 손만 들어주는
미국이 참을 수없도록 미웠을 것이다.
강자이면서 중재자역할을 맡았으면 공정한 입장이 되어야할 터인데 미국의 돈줄을 쥐고 실질적인 미국의 주인노릇을 하고있는
유대인들이 미국대통령이 아랍에게도 도움을 주도록 허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사정을 잘 알고있는 아랍인들은 자꾸만 밀어붙이면 우리는 홍해바다로 들어가라는 거냐며 볼멘 소리를 계속 해대도 묵묵부답인
미국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벌인 일이 바로 미국심장부를 공격하게된 것이었다.
감히 우리의 심장을 ?
상상도 안했던 엄청난 일에 화가난 미국이 이락과 아프간을 쳐들어갔지만 그들이 얻은 결과란 수많은 젊은이의 생명과 그 전쟁비용을
대느라 중국에 가서 계속 빌려온 막대한 빚, 각 공항을 비롯한 미국의 안전을 강화하려고 들인 장비, 인건비에 들어간 빚,
그리고 미국인들이 갖게된 불안감, 그런 막대한 댓가를 치르고 그 값이라고 죽인 테로리스트 두목, 그정도일 것이다.
”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 (마태26, 52)
예수님을 무력으로 체포하러 온 로마병정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잘라버리자 예수께서 이르신 말씀이다.
사람은 대부분 누구던지 먼저 따귀를 때리거나 멱살이라도 잡히게 되면 거의 본능적으로 힘으로 항거하려고 한다.
사적인 맞섬도 그러할진댄 민족이나 국가간의 문제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크고 작건간에 폭력은 (문제해결의 열쇠)가 될 수없음은 수많은 역사속의 사건들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우리 사람들은 지금도 결코 멈춤없이 힘으로 상대를 눌러보려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오늘 계속하고 있는 우리들의 후손들도 아마도 그대로 답습할지 모른다.
아마 그만큼 참기가 어렵고 평화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증거일지 모른다.
예수님은 그일은 어리석은 일이니 즉시 멈추라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이신 하느님이 폭력이 아닌 평화로 햬결해야한다 하셨을 땐 그길만이 살길이란 말씀 아니겠는가?
해마다 오늘이 되면 무슨 기념식이나 하듯 그때의 악몽을 자꾸 보여주어야 한다면
사람들은 그 악몽같은 장면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계기로 삼았으면 싶은 슬픈 오늘이다.
한가지 분명한 일은 골목대장이건 국가간의 일이건 양보는 강자가 먼저 해야하는 몫이고 약자더러 힘으로 굴복하라는 건 비겁한
자의 소행이다. 힘 센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의로운 사람들 )
이 어두운 세상, 어두운 세월에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신랑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며 불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일본 중앙대학의 교수인 호사끼 유지, 초등학교 교사인 미야모리 겐찌, 그밖에 많은 일본인들…
그들은 일본사람이면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릎쓰고 일본에 항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독도가 분명한 한국땅인데 왜 어거지를 쓰느냐고 일본정부에 항의하는 것이다.
위안부들을 강제로 시켜놓고 왜 잘못했다 하지않느냐는 것이다.
일본의 극우새력은 그들을 협박하고 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항의한다.
왜 ?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해 본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한국인이 만약 일본의 주장이 옳은 게 있어 그들의 편이 되어준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접할까를. ‘ 죽일놈, 배신자, 때려 죽여라. ‘ 나의 이런 생각이 절대로 틀린 것이면 너무나 좋겠다.
우리는 그가 설혹 틀리고 잘못했어도
그이가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내가 잘아는 사람, 우리나라 사람 이면 그를 일단 감싸려하지 않을까?
나부터 고쳐야 할 큰 결점이다.
나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티셔츠를 입고 우리나라의 무대에 올라
우리나라의 국민관중을 상대로 ” 독도는 우리땅 ! ” 하는 것은 좀 뭣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어진다.
우리나라 땅인 독도에 가는 대통령이 일본에 먼저 알리고 뉴스를 타는 모습처럼 어딘지 어설프고 잘못된 것만 같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아는데 왜 그들에게 ” 독도는 우리땅” 그러면서 목청을 높혀야 하는지…
젊은 가수, 김장훈.
얼마나 장한 젊은이인가?
많은 젊은 연예인들이 돈버는 일에만 불을 켜고있을 때 그는 번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모범으로 보여준 의로운 이다.
번돈을 다 독도의 영유권을 알리는 일에 쏟아넣어 오히려 빚이 생기게 했다는 소식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순교자들,
눈앞에서 목이 잘려 피를 쏟는데도 하느님 믿는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며 죽어간 순교선조님들.
조형정양등 여러 많은 젊은이들은 아프리카 오지에 찾아가서 도움을 주고있고, 또 많은이들이 동남아등 각지에 흩어져
헌신하고 있다. 우리교회의 수녀님들인 씨튼수녀님들도 에쿠아돌의 오지에서 선교와 헌신의 삶을 바치고 계신다.
전에도 몇차례나 말했던 우리 성당의 골목에서 휴지를 줍는 그 아저씨의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은 나자신은 실행하지도 않는
그 작아보이는 봉사가 너무나 큰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크고 대단한 일만이 반드시 (의로움)은 아닐 것이다.
아주 작은 일도 세상의 평화에 크게 기여하는 결실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작아보이고 그 결실은 하느님말고는 아무의 눈에도 뜨이지 않을 수 있을 일중에 그러나 너무나 엄청나고 중요한 의로운 일,
꼭 해야할 일, 그것이 우리성당안에도 있다.
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그래서 사랑하는 일 _ RESPECT LIFE _ 의 일이 그것이다.
많은이들이 관심과 사랑을 보태주고 참여해 주었으면 알마나 좋을까 ? 그런 희망에 젖어있다.
(The Way )
El camino de Santiago.
싼티아고로 가는 길.
그런 제목의 영화를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그길을 순례하던 아들이 도중 피레네산맥에서 사고로 죽자 아버지가 화장한 아들의 유골을 안고 대신 순례하는 감동의 영화였다.
나는 집안에서 쏘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너무 편하고 안이하게 그 순례의 길을 따라갔다는 자책적인 미안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순례가 나에게 어떤 뜻을 전해주고 있는지 묵상해 볼 기회는 갖게된 셈이다.
중도에서 굴복한 아들, 끝까지 순례를 마친 그 아버지.
그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물리적으로는 순례길을 중도에 못마치고 끝까지 마무리 했다는 차이 말고는 그들이 그 순례길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길을 처음 갔던 야고보의 마음을 보았다면 바로 그길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 아닐까 ?
그길을 잘마치기 위해 고급장비를 준비하고 많은 지참금도 마련하여 좋은 호텔에 묵으며 좋은 음식만 골라 먹는다면
그자신의 안전한 여행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그 참의미를 찾는데는 어떤 도움이 됐을까?
나도 젊어서 그순례길을 한번 가보는 것이 꿈중의 하나였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이룰 가능성은 점차 희박하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꼭 내몸이 그 현지를 가야만이 싼티아고의 길이라 할까?
내가 지금 꾸미고 있는 오늘의 삶안에서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길)을 바르게 찾아내고 그길을 걸어 사는 일이 바로 순례길이라
믿는다.
”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受者是 “
전생과 래세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불교의 가르침에서 나온 말이다 싶지만
” 현세를 바로 사는 이라면 전생의 삶도 알 수있을 것이며 현세를 바로 살아가는 이라면 래세의 삶도 알 수있을 것이다. “
라는 뜻이라 여겨지지만 결국 ” 바로 지금 네가해야 할 일을 하여라. 즉 바른 길을 걸어라. 는 뜻이라 싶다.
유명한 순례길이니 세계 각지에서 그길을 찾아오는 많은이들로 북적여서 이젠 마치 관광지처럼 됐다는 느낌도 없지않다.
그러나 ” 나도 그유명한 길을 다녀왔다. ” 는 것이 참여한 결과라면 관광을 갔던 셈이라 여겨지며
그길에서 ” 난 참 나를 찾았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났다. ” 는 가슴 울렁이는 소득을 얻었다면 고생속에 기쁨이 있었을 것이다.
그길에서 ‘ Difference between THE LIFE we live and THE LIFE we choose ‘ 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왜?) 그곳에 가야했으며 (무엇을 찾았는가?) 를 내안에서 답을 얻었으면 어찌 아니 족할까 ?
편하고 안이하고 잘 닦인 너른 길로 가지 말고 가시밭길을 내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신 예수님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오늘 물 한병만 들고 Air France 비랭기 표를 사러가고 싶어지네.
(옷을 입고 신발까지 신고 떠날 준비를 하고는 주머니를 뒤지니 물병 살 돈만 나오고 비행기는 외상이 안된다네. 젠장.
주제파악 하고 그 영화나 한번 더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