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떠날 때 )
When we leave 라는 제목의 영화를 빌려 보았다.
엄격한 이슬람 종교집안에서 딸을 또 다른 독실한 이슬람 집으로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도 남편은 새로 맞은 아내를 노예처럼 부리며 학대하고 그녀가 낳은 아들조차 심하게 억압하며 인간적인 삶에대한 기본마저
절망에 놓이자 그녀는 어느날 아들과 함께 도망쳐 친정으로 간다.
그간의 사정을 말하면 기꺼이 감싸주리라 믿었던 친정식구들은 종교의 율법을 앞세워 설혹 남편에게 매를 맞아 죽는한이 있더라도
시집으로 돌아가기를 강요한다.
아들과 친정에서도 쫒겨나온 그녀는 길거리를 헤메며 살아가지만 뒤쫒아 온 오빠들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조카인 아들을
칼로 살해한다.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 안은 그녀는 정처도 없이 떠나간다.
우리의 선조, 어머니들도 한번 시집을 가면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집의 귀신이 되어야한다는 유교사상으로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한맺힌 (여자의 일생)들을 살아간 슬픈이야기를 우리는 듣고있다.
율법.
과연 그것은 모든 것위에 군림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랑)보다도 더 위대한 것인가?
율법과 사랑.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그사이에서 혼동하며 혼란스러운 경우를 만날 수있을 것이다.
”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냐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다. ” (루까8,21)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들이 믿는 율법서에서도 일단 시집간 여인이 그집을 떠나는 행위는 법을 어기고 가족의 체면과
전통을 무너뜨리는 받아드릴 수없는 행위로 해석되므로 거리로 내몰았을 것이다.
”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없다.”(마르8,34)
얼마나 냉혹하고 무서운 말씀인가?
자칫하면 시험에 들고 하느님을 이웃도 미워하고 물리쳐야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오인되어 주객을 바꾸어 따를 수있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초법적인 첫째가는 계명, 새 계명은 내마음의 혼동을 말끔하게 정리해 줄 복음일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며 나의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여라는 말씀은 나에게 진리를 보는 눈을 열어준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을 등지고 버리고 떠났던 탕자일지라도 되돌아올 때엔 기쁨과 사랑으로 받아주는 비유를 알고있다.
주님의 이 계명을 능가할 율법은 없을 것이다.
요즘 무슬림을 비하하는 영화를 상영했다 해서 온 아랍권이 끓고 있다.
오늘아침에 나는 거울앞에 섰다.
거울속에 비추이는 내모습은 나와 같으면서 또한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거울속에서 또 다른 나는 같은 얼굴 같은 몸을 갖고있었지만 나의 오른손은 거울속에서 왼편에 가 있었다.
나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이웃을 비판하고 비하하는 것은 남으로 하여금 나를 비판할 수도 있을 명분을 제공해주는 자가당착이
되고 부메랑으로 되돌아돌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기야 무고한 이들을 방해가 된다고 해서 그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죄악상 마저도 사죄하기보단 역사에 묻어두자는 몰염치한 이도
한나라의 지도자가 되어보겠노라고 하는 난해한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더라도,
나의 사상, 신앙이 존중되려면 이웃의 선택도 설사 잘못돼 보이더라도 그의 선택도 존중해주면 어떨까?
또 한편 비판하는 이를 너무 격렬하게 뿌리치는 행위도 어른스럽지 못한다.
어차피 최종심판은 나의 몫이 아니니 말이다.
거울속의 나의 손이 반대편에 있다고 해서 나의 바른 모습이 변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거꾸로 가는 시계 )
시계가 약발이 다됐는지 한자리에 멈추어 있다.
약을 갈아주고 바늘을 맞춘다는 것이 잘못해서 한참을 거꾸로 돌리고 있었다.
아. 만약에 나의 삶이 거꾸로 가는 시계바늘 같다면 어찌될까?
생각에 잠겼다.
운동경기중에는 게임이 끝나는 시간을 미리 정해놓고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들이 있다.
만약에 내가 죽을 시간을 하느님이 미리 알려주고 내가 살아가도록 하였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우선 나는 하느님이 죽을 시각을 알려주셨어도 아마도 나는 그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미리 죽고야 말 것이란 생각이다.
침이 마르고 애간장이 타고 매순간이 초조해서 어떻게 견딜 수있겠는가?
매일 일어나면 우선 달력을 들여다 보고는 이제 몇날, 몇시간이나 남았는지 셈을 하게될 것이다.
그리고는 밥을 먹으려다 말고 다시
달력앞으로 와서는 또 한번 계산을 해보고 그리고는 입맛이 떨어져서 밥먹는 일을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일을 보러 나가려다 다시 들어와 앉아 생각에 잠길 것이다.
‘ 아, 이제 얼마나 더 살거라고 볼일은 무슨 볼일, 다 집어치우고 말자. ‘
그랬다가 ‘ 그래도 꼭 볼일인데 나가야지?.’ 안절부절 섰다 앉았다 그러면서 저녁노을을 맞이할 것이다.
다시 생각에 잠긴다.
사실은 나의 삶이 시계바늘이 앞으로 가거나 거꾸로 가거나 그것과 무슨 상관인가?
실은 나의 죽을 시각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다만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고 나를 내신 하느님만 알고 계실뿐이지.
그런데 왜 미리 그걸 알게됐다고 해서 나의 삶의 내용이 달라져야 하는가?
지금까지와 같이 그렁저렁 살아가거나 아니면 최선을 다해서 삶의 내용을 충실히 채워가던가 그것만이 나의 선택 아닌가?
시계바늘을 그리고 달력을 늘 바라보면서도 초조해 하지도 않고 태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앞으로도
천년만년 살지도 모른다는 아둔한 기대감으로 그랬을 것이다.
이제 나는,
오늘이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그 마지막날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나의 삶을 충실하게 꾸리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그래도 주님이 또 다른 하루를 허락하셔서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뜨게된다면 나는 주님께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되어
어제보다 더 열심히 더 충실한 삶을 주님안에서 꾸리도록 노력해야겠다.
하루, 또 하루를 그런 마음이 되어 산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아마 늘 그래왔듯이 (작심삼일)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있을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며 조금은 아까보다 편한 마음이되어 TV를 켜보니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고 시작했던 농구경기가
지금 막 끝났다고 하는 바람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게임은 볼 수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