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들은 참으로, 참으로 특별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중에도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고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가톨릭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특히 그렇습니다.
” 우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통령선거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 라는 미국주교회의 생명위원회의 Dinardo 추기경의 말을
빌리지 않고라도 어째서 그런지 공감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지금 저는 결코 이 공간을 빌려 어떤 종류라도 선거운동을 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도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으며 정치활동에 가담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투표)는 각개인의 신성불가침의 고유권리이므로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없으며 교회라 할지라도 개인의 그 권리를 침해할 수없습니다.
다만 미국천주교주교회가 발표한 ( 가톨릭신자로서 대선에 임해야 할 자세 ) 에 대한 지침서를 중심으로 신자로서 명심할 필요가 있고
심사숙고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그 내용을 함께 나누려고 할 뿐입니다.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선거의 철이 오면 각 후보는 온갖 공약을 내 놓고 국믿들에게 자신의 것을 사달라고 입술에 침을 바릅니다.
그중에는 그럴듯한 것도 뻥튀기같이 보이는 것도 다양하지만 일단 선거가 끝나면 대부분이 정치적인 헛공약이였고 뻥튀기였다는 걸
우리는 여러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 이민동포들에게 특히 민감하고 그래서 관심이 있을 중요 이슈만을 간추려 들여다 봅니다.
( 이민문제)
어느 후보가 돼던지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일손이 모자란 미국이 거의 무차별로 이민을 개방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큰 테러를 당하고 또 경제여건이 어렵게 되자 미국 국내에만도 실업자가 득실거리고 또 테러공포 때문에 이제 막 받을 수
없는 사정이 되었습니다. 마구 문을 열면 자국민의 반발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표를 의식한 후보들은 이런 저런 장미빛 공약을 내걸어 우리 이민 1 세들을 혼란스럽게도 하고 관심을 끌기도 합니다.
결론은 어느쪽도 쉬운 일이될 수없을 것이란 점입니다.
( 건강보험 )
현대통령은 소위 (오바마케어 Obamacare ) 라는 공약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얼핏 개인사업을 많이 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경제가 어려워져 비싼 보험료를 감당할 수없는데
사정이 어려운 모든 국민이 싼 값에 강제로 꼭 보험을 갖일 수있게 한다니 그렇지요.
그런데,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것은 얼핏 국가가 부담해주는 한국의 공영보험제와 혼동할 수있지만 그와는 다른 사보험입니다.
미국은 공보험제가 없고 모두 사보험제도입니다.
보험회사들이 의료비를 지불해준다는 것인데 보험회사가 어떤 곳인가요.
영리회사이지요. 무작정 우리 의료비를 내주는 게 아니고 국가재정으로 보충해주지도 않으니 그 돈은 국민들의 세금을 그만큼 올려서
그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겠지요.
결국 기술적으로는 구체적으로 두고봐야겠지만 국민보험은 국민의 주머니돈으로 감당해야겠지요.
자동차보험을 차주가 사야하는 것과 비교하면 쉬울지요.
( 그냥 지나칠 수없을 것들 )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눈감고 넘어갈 수없는 가장 중요하다고 해야 할 요점은 무엇일까요 ?
(생명 ) 에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때문에 또 복음때문에 제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 마르8,36)
대통령후보들의 생명에 관한 공약은 대충 이렇습니다.
현직 대통령은 4 년전에도 그랫듯이 이번에도 (낙태)를 합법화하며 지지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 부도덕한 (동성결혼)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상대후보인 민주당후보는 처음에는 어떤경우도 낙태는 무조건반대라고 하더니 Pro-choice 그룹을 비롯한 여성운동가들의 표를
의식하였는지 수정하여 강간에 의한 임신이나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등 부득이한 경우는 제외한다고 엉거주춤 한 자세로
물러서고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기독교신앙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셈입니다.
양쪽 모두 합당하게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드시 어느쪽이 됐든 선택은 해야된다고 할 때 고민스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썩은 과일이 딱 두개뿐인데 그래도 꼭 골라야만 한다면 완전히 썩은 것보단 조금 덜 썩을 걸 집는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함께 생각할 심각하고도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이루신 인간생명은 다 고귀하며 더 중하고 덜 중한 차별이 있지 않습니다.
설사 태어날 때부터 지체부자유한 장애인으로 태어났다해서 다른이보다 결코 덜 중하지도 않으며 우리는 매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장애를 딛고도 몸이 성한 이들보다도 더 훌륭한 업적을 세운 이들의 예를 헬렌 켈러를 비롯하여 우리는 수없이 봅니다.
저 자신도 몸은 성한 편이면서도 남을 위해 별로 좋은 일을 하지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심히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우리는 몸은 성하면서도 사회에 병페를 끼치는 이도 보고 몸은 불편해도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많은 이를 보고 있습니다.
강간등으로 원치않는 임신을 한 이의 심적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여야 하지만 그래도 아기의 몸에는 엄마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낳아도 정말 키우기를 원치 않으면 가톨릭기관에서도 입양등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엄마의 생명이 위험해서 낙태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정말 두번 세번 잘 생각해야할 일입니다.
여기에 제가 하나의 비유로 예를 들어 나누도록 하지요.
가령,
아기의 엄마가 지금 사고로 물에 빠져서 도저히 살아나갈 사정이 못된다고 가정한다면
그때 마침 나의 아들이나 딸이 엄마가 위급상황인 것을 보고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지르면 발을 구루고 있는데 물에 빠진 내가
다급한 마음으로 내 아이의 손을 잡아 물에 끌어들여 죽도록 빠트려놓고 내가 대신 땅으로 올라와 살 수있게 되었다면 그 일이
과연 살아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있겠습니까?
아이 스스로 엄마를 위헤 살신성인으로 희생한 것도 아니고 내가 살아나려고 아기를 대신 죽였다면 나는 하느님 앞에 살인죄를
짓는 것은 물론 나는 그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곁에 함께 살고있는 아이와 내몸안의 내 아이와의 차이란 다만 얼굴을 아직 대면하지 않았다는 것 뿐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벗을 위해 나의 목숨을 잃는것처럼 더 의로움은 없다. 고 하셨는데
내가 살아나자고 누구도 아닌 나의 친 자식을 대신 죽일 수있다니.
바로 이런 것을 공약이라고 내놓고 표를 달라고 합니다.
지난 4 년간의 업적을 보아서 과연 현정권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경제적인 혜택을 줄 수있을지 극히 의문스럽지만
설사 만약에 나에게 앞으로 4 년간 개인적으로 물질적 이득을 얻게될 수있다거나 다른 혜택이 전망된다 하여도
막연한 그것을 바라며 신앙인에게 생명과 같은 복음의 실천을 묵살한다거나 한다면 그것은 때가되어 반드시 우리의 주님께서
나에게 물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신앙인의 가치관이 예수님의 복음보다 세상적, 물적 이해상관을 더 위에 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수도 없이 강제로 억울하게 스러져 간 하느님의 귀한 어린생명들이 엄마 찾는 목소리가 귀를 울리는듯 합니다.
무자비한 어른들에 의해서 살해당한 어린 생명들의 억울한 목소리들이 나의 육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지라도
그 소리가 합창이 되어 내 가슴을 두드리며, ” 지켜주세요 ! ” 하는 호소의 소리가 내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우리가 함께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죽임앞에 섰을 아기들의 생명지킴이가 될 수있었으면 하고 희망을 품습니다.
이 말씀을 나누며 단돈 30 량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로마병정에게 팔아 넘겼던 가리옷 사람, 유다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연일지요.
인간샘영 보다는 아주 작을 나의 이해상관 때문에 복음의 가르침을 외면한다면 어쩌면 그 행위도 로마병정에게 주님을 넘기는 바와
다를 바 없지는 않을지요.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 마르5,13)
주님의 평화가 언제나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_ 본당의 RESPECT LIFE 제공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