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도수가 있는 안경을 여러 해 째 끼고 다녀서인지
피곤해지거나 할 때는 눈이 뿌연해지고 사물을 보는데 어려움을 겪게 됨니다.
안경을 벗으면
바로 저만치서 걸어오는 아는 이의 얼굴을 못 알아볼 때도 있게 되지요.
다 같은 사람의 눈으로도 이렇게 잘 보는 이도 있고 또 잘 못보는 이도 있게 마련이지요.
예수께서는,
”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
( 요한 9:39 )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핏 듣자면 참으로 의아스럽고 알아듣기가 어려울 그런 말씀입니다.
태어날 때 부터 소경인 사람도, 죄 많은 이의 병도 기꺼이 고쳐주시는 예수님이신데 지금 멀쩡히 잘 보고있는 사람을
못 보게 하시려 이 땅에 오셨다니 도무지 어쩐 연유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까요.
아마도
당시 예수님을 극성스럽게 쫒아다니며 괴롭혀 드리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같은 그런 이들을 염두에 두시고 하셨던
말씀이 아니였을까 헤아려 봅니다.
그네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잘 보면서도
바로 눈 앞에 곁에 와 계시는 하느님의 외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할 뿐 더러 그분을 오히려 괴롭혀 드리며
죽이려는 음모까지 서슴치 않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2,000 년 전에만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 자신도 때때로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을 못 알아볼 때가
없다고 말하기 곤란할 경우가 있겠지요 ?
주님의 뜻과 그 가르침과 계명을 육신의 눈은 뜨고도 모르거나, 알면서도 외면하고 행치 않거나 또는
이웃의 불의 를 보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며 사는 일들이 ( 보면서 못 보는 ) 경우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많이 영적으로 장님의 행실을 버젓이 행하고 있을지요.
남의 말 할 것도 없이
제가 아주 솔직해 지자면 때때로 소스라치게 놀라지는 때가 너무나 자주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바로 바리사이 처럼 위선적인 생각과 말과 그리고 행위를 버젓이 하는 저 자신을 들여다 보니까요.
나와 손 잡고 함께 걸으며, 함께 먹으며 그렇게 사랑하는 나의 아들 그리고 딸을 누가 해치려 한다면
온갖 힘과 수단을 동원해 방어하려고 당연한 행위를 하지만
바로 그 엄마의 태 안에서 엄마의 양분을 받아 먹으며 숨 쉬며 태어나 엄마를 만나 볼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모태의 아기를 돈을 내고 악덕의사의 힘을 빌려 죽이는 일을 태연하게 하다니 그 무서운 엄마의 마음을 상상이나
쉽게 하게 되나요 ?
이번에
새로 교황직에 오르신 프란치스꼬 교황님도 특별히 (생명 사랑 )을 강조하고 계시고
먼저 번의 베네딕토16 세 전 교황님도, 또 그전의 요한바오로 2 세 전 교황님도 기회 때 마다 사람의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때 보다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현세대 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더 많은 기도와 생명을 사랑하는 행위가 요청되고 있는 시간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