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월 소 공동체 자료
(주제 복음 및 소 공동체 자료는 개인이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주제 복음 : 구역, 반 모임 주간에 따라 복음 선택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루카 9,11ㄴ-17
연중 제10주일 루카 7,11-17
연중 제11주일 루카 7,36-8,3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ㄴ-22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루카 9,51-62
시작, 마침성가 : 201번 또는 예수성심 성가 중에서 선택 하십시오.
영혼의 빵과 포도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하늘로 오를 수 없는 인간을 위해 하느님께서 땅으로 내려 오셨다.”라는 그 은밀한 가르침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면, 인간이 하늘로 오르는 곳에 성체성사를 자양분 삼도록 하신 것은 하느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축성된 빵을 주시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주시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으로 수도자의 하루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로 시작하게 하셨지만, 사제의 하루는 미사로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엄마의 손끝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 어떤 음식도 엄마의 사랑과 정성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엄마의 손끝을 떠나지 못하는 사랑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오를 수 없는 인간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몸과 피를 영혼의 빵과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오늘도 미사를 통해 우리를 영혼의 만찬에로 초대합니다.
인간 사랑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느님 사랑
연중 제 10주일
6월의 푸르름은 결코 태양빛에 들뜨지 않습니다. 내리쬐는 태양도 푸르름 앞에서 차분해지는 6월은 그래서 신록의 계절이고 영원히 시들 것 같지 않은 하지만 결코 들뜨지 않는 생명이 자리합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적이 예외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베풀어진 은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청하는 이에게 은총을 허락하셨고 그때마다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사랑을 해도 아픔은 전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대신 아파해 줄 수 없고 아무리 사랑해도 대신 죽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 사랑의 한계이고 슬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계를 오늘 넘어서십니다. 기적이 하느님 마음의 출렁거림이라면 하느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늘 인간의 절박한 아픔이었습니다. 그것이 대신할 수 없는 죽음조차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게 한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참된 기적이란 이렇게 대신할 수 없는 죽음조차 대신하게 하신 하느님 사랑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전이되지 않는 인간의 아픔을, 아무리 뭇 생명들이 죽어간다고 해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결코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 인간 사랑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느님 사랑은 그렇게 들뜨지 않는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랑의 포토샵
연중 제 11주일
있는 그대로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기술입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에 마음이 실리면 예술이 됩니다. 기술은 정확함을 생명으로 하겠지만 기술이 마음이 그리는 화폭이 되면 삶은 예술이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실물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포토샵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술조차 인간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것이고 보면, 마음이 없으면 결코 사진이 아름답게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식탁에서 죄인인 여자 하나가 향유를 든 옥합을 들고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예수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어떤 이는 향유의 낭비를 아까워하고 어떤 이는 부도덕한 여인을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안고 오는 한 여인을 보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많지만 무엇을 보느냐는 늘 마음속에 담겨진 삶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가 세상을 품는 깊이와 크기가 됩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 삶에 포토샵 기술을 동원하십니다. 그 사랑의 포토샵을 동원하지 않으셨다면 누군들 단 하루도, 단 한순간도 오늘을 지탱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오늘을 숨 쉬게 하고 내일을 꿈꾸게 합니다. 자신의 죄를 등 뒤가 아니라 눈앞에 두고 나아간 여인의 용기가 그래서 더욱 부럽게 다가옵니다.
평화에 대한 간절한 바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입으로는 간절히 기도해도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통일이고, 입으로는 청하지만 결코 그렇게 할 마음이 없는 것이 용서인지 모릅니다. 어릴 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할 때는 간절함과 당연한 절대적 소명처럼 느껴졌지만, 오늘날 물질적 풍요 속에 깃든 현실은 그 당연함조차 의문시하게 되었고 간절함은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라는 것처럼 위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면서 남북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하는 주일입니다. 휴전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도 어김없이 평화보다는 남북의 긴장이 더욱 고조 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어쩌면 “전쟁보다는 비겁한 평화가 낫다.” 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설득력 있게 다가온 적도 없을 겁니다. 통일에 앞서 평화 정착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세상에는 바라지 않았던 것이 주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또한 바라는 만큼 노력하지 않는 것이 주어지는 법은 더더욱 없습니다. “역사는 당연히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민이나 국가를 심판할 뿐” 이라는 말처럼 평화에 대한 간절한 바람 없이 통일은, 그것도 평화통일은 때가 되면 떨어지는 감은 아닐 것입니다. 해서 휴전선의 155마일에 걸쳐 있는 철조망보다 우리 마음에 쳐 있는 철조망이 더 크고 견해 보이는 오늘, 한반도에 하느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교황님을 향한 기도
연중 제 13주일, 교황 주일
시인이 바람에 색칠하는 사람이라면, 교황은 세상이라는 화폭에 하느님 마음을 채색하는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볼 수 없지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볼 수 없는 하느님 존재를 드러내 주고 가톨릭 신앙의 일치를 드러내 주는 상징이 바로 교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 13주일이면서 교황 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부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 하고 탄식하십니다. 어쩌면 그 탄식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분이 교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만큼의 높이에서 그 만큼의 세상을 보는 법이지만 세상 모든 것을 보는 눈은 아름답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보이는 그 모든 것은 아름답기보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보는 그 만큼을 살아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형벌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늘 역설을 간직합니다. 높은 사람이 누리고자 하면 세상은 힘겹고, 지도자가 고통을 자처하면 세상은 살만해집니다. 지도자가 인사 받기만 원하면 권력이 되지만, 허리 굽혀 먼저 인사하면 마음의 출렁임이 사랑의 파도를 타게 됩니다. 그 모진 역설이 교황님을 향한 기도의 손끝을 모으게 합니다. 그 모진 삶에로 기꺼이 밀어 넣은 것이 우리들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지난달에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을 믿나이다.”이어 사도신경 묵상입니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심을 믿나이다.’
창밖 나무들의 연한 잎과 새싹이 생명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시절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사도 신경은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을 고백한 다음 바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심’에 대한 고백으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파스카의 신비(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에 관해 고백함으로써 예수님 사명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신 말씀이십니다. 사실 본시오 빌라도에 대한 역사적 증언은 많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재물을 바치려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잔악한 지배자요(13,1), 유약하고 타협적인 통치자의 모습입니다(23장). 그렇지만 빌라도의 통치를 언급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역사의 한 인물로 사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14) 라는 요한복음서의 증언처럼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하여 당신의 인성을 드러내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은 그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하심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4,15-16)
우리의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을 우리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통해 깊이 새깁니다.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을 쓰시고 조롱을 받으십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지쳐 넘어지면서도 성모 어머니와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십니다. 키레네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돕고, 성녀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드리지만 무거운 십자가로 인해 다시 넘어지십니다. 그리고 골고타에 이르러서는 군사들에게 옷 벗김을 당하시고 신 포도주까지 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죄하시지만 당신께서 받으시는 고난을 통해 삶의 자리에서 겪게 되는 우리의 고난에 함께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일깨워주는 사랑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고난 받으심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고난의 길에 함께하겠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고난, 주님께서 맡겨주신 십자가를 날마다 기꺼이 지고 가겠다는 결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쉽게 읽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
지난달“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톨릭 교리서 571항~630항> 이어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나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31항~658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처럼 돌아가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죽은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죽은 이들이 있는 곳을 저승 또는 지옥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승에 가셔서 거룩한 영혼들을 구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구하거나 저주받은 지옥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보다 먼저 간 의인들을 해방시키고자 저승에 가신 것입니다”(633항). 저승에도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완전하게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행하여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는 신약 성경이 증언하듯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을 보여 주는 실제 사건입니다”(639항).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안식일 다음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료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에 갔습니다. 그러나 무덤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고 슬퍼서 막달라 마리아는 울었습니다. 이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쉽게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리 제자들에게 당신이 수난을 받을 것이며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막상 붙잡혀 끌려가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도 화를 입을까 두려워 숨어있었습니다. 이렇게 떨고 있던 제자들 앞에 예수님은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짐으로써 생겨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유령이 아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은 돌아가시기 전의 그 몸이 더 이상 아닙니다.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 빈 무덤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났다는 사실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확인되지만, 모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는 면에서 부활은 여전히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24,46)는 구약의 약속과,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안 말씀 하신 약속을 실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들을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으며,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심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는 근원이며 원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15,20-22).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사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도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도다.”(비잔틴 전례, 부활 대축일 마침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