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월 소 공동체 자료
주제 복음 : 구역, 반 모임 주간에 따라 복음 선택 가능합니다.
연중 제22주일 루카 14,1.7-14
연중 제23주일 루카 14,25-33
연중 제24주일 루카 15,1-32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연중 제26주일 루카 16,19-31
시작, 마침성가 : 285번, 286번 또는 순교성인 성가 중에서 선택 하십시오.
득위(得位)와 실위(失位)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지혜를 흔히 처세(處世)라고 합니다. 특히 사람들은 애매한 상황에서 처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지요. 동양의 고전들은 이와 관련해서 ‘자리’를 강조합니다. 제자리를 잘 찾는 것을 득위(得位)라 하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것을 실위(失位)라 합니다. 그야말로 득위는 만사형통의 길이지만 실위는 만사불행의 원인이 되겠지요. 바로 이 ‘자리’가 인간의 욕심과 관련되면 한 개인만이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사람 역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도 ‘자리’를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와 비슷한 ‘자리’ 이야기를 20장 46절에서도 언급합니다. 상석(上席)을 좋아하는 율법 학자들을 나무라면서 말입니다.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요령, 즉 처세를 강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 윗자리를 위한 요령이 아니라 바늘귀처럼 좁디좁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신앙인의 지혜를 알려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겸손’이지요.
오늘 제1독서도 이 ‘겸손’을 노래합니다. 함께 불러 봅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높고 귀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온유한 이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보여주신다.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18-20)
묵상 :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 ‘겸손’을 생각해 봅시다!
발가락이 닮았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의 줄거리입니다. 32세의 노총각 M이 친구들 몰래 결혼을 하지요. 그런데 친구 중 한 명, 바로 의사인 ‘나’는 M이 총각 때의 무절제한 생활로 성병을 앓아 생식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2년 후 어느 날 M이 갓난아기를 안고 ‘나’에게 오지요. 아이가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지만 M의 속셈은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면서도 그 애가 자기 아이라는 보장을 얻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발가락 뿐 아니라 얼굴도 닮은 데가 있네.” 친구 ‘나’는 이렇게 모른 척 해주지요. 그러자 M은 말합니다. “이 놈이 꼭 제 증조부를 닮았거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소설을 생각한 것은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보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닮으려면 다음 세 가지를 행하라고.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셋째,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 닮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해보려 합니다. 간절히 원하고 행하면 그분께서 듣겠지요.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정성껏 도운 너의 거친 손바닥과 발바닥이 못에 뚫려 구멍 난 내 손바닥과 발바닥을 닮았구나.”
묵상 : 주님 닮기에 더 없이 좋은 계절, 바로 가을입니다. 우리의 마음, 손 그리고 발은 이웃을 향해 있나요?
마음을 찍는 사진기
여름내 지고 온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볍게 하고자 이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증명사진을 제출할 일이 있어 이발을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을 찍는 사진기’ 라는 글이 떠올랐습니다. 「시장에 고물 사진기가 나왔는데 그 사진기는 세상의 온갖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거의 고물이 되다시피 한 사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진기는 사람의 마음을 찍는 요술 사진기였습니다.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팔기 위해 시장에 나오신 아저씨를 찍으니 큰 입을 벌리고 돈을 세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장으로 나온 아이들을 찍으니 떡볶이, 호떡, 인형 등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인상이 험상궂은 사나이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슬금슬금 길을 비켜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언제 칼을 꺼내서 위협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진기 뒤로 몰려갔고 어떤 마음이 찍힐지 매우 궁금해 하였습니다. ‘찰깍’ 찍힌 사진에는 방긋 웃는 어린 아기의 얼굴이 나타났고 그 사나이는 시장에서 미역을 사고는 금방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부끄러워 그 사진기에서 멀리 떨어졌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큰아들의 마음이 제 안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형제를 쉽게 판단하는 선입관과 상처를 주는 내 올바름의 잣대!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사진에 나타났을까요? 잃었던 작은 아들을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토라진 큰아들도 당신 품에 안으시려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묵상 : 인간의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그려봅시다.
두메 꽃처럼
오늘은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 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103명의 성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과 이웃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우리 순교 성인들을 본받아 주님께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증거 할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실 조선시대 조정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01년 신유박해까지 더하여 100년 넘게 계속되었고, 103위성인 외에 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서학의 평등사상으로 말미암은 양반 위주의 사회질서 파괴와 유학정신의 근간인 조상제사의 거부가 박해의 주된 이유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적 다툼과 이권이 더 큰 이유가 되었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내 님만 믿었기에, 비록 값없이 스러져 가셨지만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했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더 기억하고 싶습니다. 옛날의 순교자들처럼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쳐야 하는 상황은 오늘날 더 이상 없지만 자신의 이기심과 편안함을 부추기는 지금의 물질 만능의 삶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기에”(루카 9,23) 더욱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기억하려 합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보신다면야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마음을 다지는 뜻으로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라는 시(詩)를 이렇게 숨어서 겸손하게 바칩니다.
묵상 : 땀과 눈물의 순교를 위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나요?
부자 되세요?
누구나 부자(富者)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부자를 대접하고 존경하는 사회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은 사회이기에 재물 형성에 대한 비리와 의심이 만연해 있고, 그러다 보니 부자들은 대부분 부도덕한 졸부라고여깁니다.
성경도 부자에 대한 생각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의 구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18,24-25)
오늘 복음을 봅니다. 비록 비유이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의 처지가 하느님 나라에서는 지상에서와 정반대로 역전됩니다. 지상에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지상에서 고통 받던 라자로는 저승에서 아브라함 곁에 있게 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자들을 싫어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우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결정적 표징은 비상한 기적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일관되게 가르침을 주시는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이를 올바르게 이용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묵상 : 남보다 잘 살아감의 의미는 가진 것이 많다는 데 있지 않고 누가 더 깨어 있는 삶을 사는가에 있습니다.
지난달에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심을 믿나이다.’ 이어 사도신경 묵상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음을 믿나이다.”
33(서른 셋)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신 햇수입니다. 평균 수명 100세 시대를 이야기하는 요즈음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삶이었습니다. 특히나 짧게 느껴지는 공생활 3년, 하지만 너무나도 깊디깊은 삶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가르치셨던 ‘사랑의 계명’을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제물이 되심으로써 온전히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중죄인을 처벌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증거, 사랑의 절정의 표징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 라고 하신 그 말씀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삶은 신앙인들에게는 따라야 할 삶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23세는 선종하기 며칠 전 보좌관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 사목의 비밀은 자네가 볼 수 있는 내 침대 저편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있다네. 십자가를 걸어둔 것은 일어나자마자 보고, 잠들기 전에 보기 위해서야. 똑바로 보게, 내가 보는 것처럼. 벌려 들고 계신 저 두 팔이 내 직무의 계획표였다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 전부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어느 누구도 그분의 사랑과 용서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는 걸세.”
(<산다는 것이란 되어 간다는 것>, 17쪽)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이제 그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풀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무덤에 묻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 옆 백인대장처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15,39)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기도 전후에 십자 성호를 긋거나, 가정이나 성전의 중앙에 십자가를 걸어 두거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 이상의 무엇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결심을 하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를 몇 번씩이나 그을 것입니다. 또 십자가를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가 긋거나 바라보는 십자가는 장식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십자가여야 합니다. 세로와 가로 기둥으로 이루어진 십자가는 ‘하느님사랑’과 ‘이웃 사랑’의 하나 됨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벗이자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내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나눌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누구를 찾아가시겠습니까?
| 쉽게 읽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
지난달“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나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31항~658항>이어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59항~682항>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 근처에서 제자들을 강복하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주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지니고 계심을 뜻합니다. 하늘에 올라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께서는 지상 교회 안에 머무르십니다.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예수님의 나라는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데 함께 일하시면서 기적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며 당신이 함께 하고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쳐 주실 때 제자들은 지금이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인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사도1,7)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 왕국이 영광스럽게 세워질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밝히셨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결정적인 질서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합니다.”(672항).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많은 신자들이 신앙이 흔들리게 될 마지막 시련을 겪고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스스로 재림예수라고 하는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인간의 문제를 당장이라도 해결해줄 듯이 속일 것이라고 합니다. 거짓 그리스도의 이 사기는, 역사를 넘어 종말의 심판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역사 안에서 이룬다고 주장할 때마다 이미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장차 메시아나라를 왜곡한 이른바 ‘천년 왕국설’과 그 완화된 형태까지도 배격했으며, 특히 ‘본질적으로 사악한’ 세속화된 메시아 신앙의 정치적 형태를 배격했습니다(676항).
주님 말씀에 따르면 지금은 성령과 증거의 때이지만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은 언제 올지 모를 그날과 그 시간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 중에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위선적인 행동과 남모르는 마음속 비밀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믿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 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 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마주한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였는지 아니면 거절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속자로서 인간의 모든 일과 마음을 결정적으로 판단하실 충분한 권한이 있으십니다.”(679항).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영원한 생명과 끝없는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주실 수 있으므로, 우리도 희망을 안고 그분을 뒤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