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년 2월 소공동체 모임 자료

2014. 2월 소 공동체 모임
 
 
 
주제 복음 : 구역, 반 모임 주간에 따라 복음 선택 가능합니다.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2월 9일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

시작, 마침성가 : 66번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다.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는 무엇일까?
                     역시 인간이다.
                     …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존재를 바치는
                     모범을 보여준 스승이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인간’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라는 구절을 처음과 마지막에 반복하여 노래하는 시편 8편은 찬양시편들(8; 19; 29; 33; 66; 100; 103; 104; 111; 113; 114; 117; 145-150) 중 하나입니다. 먼저 주님께 찬양을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이유를 밝히면서, 다시 찬양을 드림으로 마치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를 하늘과 달과 별, ‘하느님 손가락의 작품들’을 바라보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작품들을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신 사실로 찬양의 이유를 밝힙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품위를 들어 올려주셨습니다. ‘신들보다(천사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인간이란 무엇인지, 자신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자신의 존재 근거와 이유, 그리고 지향하는 삶의 목표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를 품위 있게 만들어주신 하느님께로 모아집니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쉬기 전에는 항상 불안한 존재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만 참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로부터 왔고,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 품위에 걸맞은 삶, 인간다운 삶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표어에 따라 평생을 주님을 찬양하며 인간 사랑에 애쓰신 분이 김수환 추기경님입니다.

김 추기경님께서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다.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는 무엇일까? 역시 인간이다. …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존재를 바치는 모범을 보여준 스승이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월 16일, 추기경님의 선종 5주기를 맞이하면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키우고 실천해야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또한 그 응답의 삶 안에서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어 사도신경 묵상입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에 대한 믿음(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세우셨고, 성령께서 채워주시며 다스리시고 일치를 이루어 주시기에 하나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이 비록 하느님 앞에 부족한 죄인들이지만, 성령께서 머무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모임이기에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거룩하게 할 도구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구성원인 우리 각자가 성화되어야 하지요.

아울러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며 전 인류에게 파견하시어 만민을 구원에로 이끌기 위하여 열린 보편된 교회입니다. 지금껏, 앞으로도, 영원히 종말까지 구원의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는 사도들에 기초한 사도 계승의 교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살았던 모습, 복음의 증거자로서의 삶을 우리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구별되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의 문제를 판단하고, 식별하고, 실천해야 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연대하는 교회 공동체는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모두를 한 가족이 되게 합니다.

천국의 가족, 연옥의 가족, 지상의 가족이 서로 공로를 주고받는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기에 기도 안에서의 연대를 청하게 됩니다. 천상 교회의 성인들께 기도를 전구하면서 우리는 영적인 힘의 동반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 역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또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영적인 힘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정화가 필요한 연옥 가족들을 위하여서는 기도, 희생, 선행, 위령미사, 위령기도, 대사를 바칩니다. 또한 지상 가족들끼리도 서로를 위하여 기도, 자선, 단식을 통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은 거룩한 교회 안에서 거룩한 신자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랑 실천의 공로를 서로 나누는 가운데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에 대한 믿음’을 삶으로써 증거 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기초한 고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4)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교회 공동체는 부활 성야 예절에 사용한 ‘부활 초’를 세례성사와 장례 미사에서 다시 밝힙니다. 이는 세상의 빛이시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한 사람의 새로운 탄생과 죄의 용서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부족하기에 죄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헛되이 사용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 사이의 관계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깨뜨려진 관계를 회복하여 하느님 안에서 일치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일깨워주셨습니다. 또한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 안에서 우리 죄의 용서를 청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실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용서를. 또한 우리는 믿습니다, 육신의 부활을.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마태 18,22)

죽음은 삶의 마감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 부활의 삶으로 옮아가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라고 말씀하셨고, “부활을 통하여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변화할 것”(1코린 15,52)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에 대한 말씀은 신앙인 모두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이며 이 세상에서의 실천을 위한 사명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 쉽게 읽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976항~1019항 >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결합시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가장 주요한 성사입니다. 우리가 세례성사 때에 받는 용서는 완전하여, 원죄나 우리가 지은 

죄나 또 그 죄들을 속죄하기 위해 받아야 할 어떤 벌도 없애줍니다. 그러나 세례성사로 깨끗해졌다 하여도 우리의 나약함이 다시 죄를 짓게 합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뉘우침이 진실하기만 하면 용서받지 못 할 잘못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뉘우치고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 모두가 용서 받기를 바라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하시며,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으며, 이 권한은 주교와 사제들을 통하여 고해성사 안에서 행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영원히 사시는 것과 같이, 의인들도 죽은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며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바랍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부활 신앙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이신 분에 대한 믿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증인’(사도 1,22)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의 분리인 죽음으로 사람의 육신은 썩게 되지만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립니다.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는 우리의 상상력과 이해력을 뛰어 넘는 것으로, 신앙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부활의 능력을 통해, 우리 육신을 우리 영혼에 결합시키심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신에 돌려주실 것입니다.”(997항)

죽은 이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 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1테살 4,16-17) 무덤 속에 있는 죽은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요한 5,29)

우리는 육신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육신을 속량하기 위해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을 믿고, 육신의 창조와 구원의 완성인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어 자유로이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셨으며, 이로써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1019항)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이어 함께 하는 복음 묵상입니다.

성당 아이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루카 2,22-40

이스라엘의 모든 부모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는 봉헌례(탈출 13,2.12.15)를 치러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가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루카는 여기에다 산모의 피 흘린 부정을 벗기 위한 정결례(레위 12,1-8)를 함께 전해주면서(루카 2,22-24) 단순한 역사 기술을 넘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신앙인의 기본자세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오랜 세월을 의롭고 독실하게 살며 성전을 떠나는 일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겨온 두 어르신의‘직언(直言)’같은 ‘예언’을 귀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 깊이 간직하며 헤아려 보지요. 백발노인 시메온과 늙은 과부 한나도 “이스라엘의 위로”(루카2,25)와 “예루살렘의 속량”(루카 2,38), 즉 ‘하느님 백성의 구원’을 생전에 보게 되었음에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 덕분에 이 아이는 루카 복음 내내 성전을 제 집으로 알며, 그곳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47)

우리 아이들도 유아세례를 받고, 초·중·고등부 주일학교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자녀의 신앙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젊은 신자 부부들과 입시 때문에 공부만 하라며 성당가기를 막는 신자 부모님들에게 한 말씀 해주실 시메온과 한나 같은원로(元老) 신자분들 어디 계신가요?

★묵상 :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나트륨 줄이기 운동
2월 9일 연중 제5주일·마태 5,13-16

소금은 나트륨(Na, 40%)과 염소(Cl, 60%)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나트륨은 삼투압 및 신체평형 유지, 신경자극 전달, 근육 수축 그리고 영양소 흡수 및 수송에 필수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적은 양으로도 체내 작용을 하지요. 문제는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세계 보건기구(WHO)에서 권장하는 1인 섭취량의 2.4배를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소금의 과다섭취가 골다공증·고혈압·심장병 및 뇌졸중·위암·만성신부전을 쉽게 유발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트륨 줄이기 운동’이 정부 차원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소금은 어떤가요? 물론 성경에서도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욥 6,6), 정화하는 특성을 지니며(2열왕 2,19-22), 음식을 썩지 않도록 보존케 한다고(바룩 6,27) 말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짠맛을 결코 잃지 않는 소금의 특성을 바탕으로 “소금 계약”(민수 18,19; 2역대 13,5)이라는 말을 더 강조하지요. 즉 어떠한 약속이나 계약의 항구한 가치를 말하면서 하느님과 인간이 맺는 계약에 그 영원성을 부여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역할을 소금에 비유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사람들의 세상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 안에 보존하고 또 그 세상에 ‘살맛’을 더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소금과 같은 역할을 잊고, 소금을 과다하게 섭취하려는 데 있습니다. 문명의 발달, 인구의 증가 그리고 음식 종류의 증가에 따른 조리법의 다양함 때문에 소금을 더 많이 찾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소금 소비의 증가가 인간 욕심에 비례한다고 말하지요. 예수님께서 왜 사람을 소금에 비유하셨는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묵상 : 가톨릭 신자로서 세상 안에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가슴 아픈 것과 골치 아픈 것
2월 16일 연중 제6주일·마태 5,17-37

예수님께서는 첫 전도 여행에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십니다.(마태 4,23) 그리고 특별히 산 위에서 ‘행복 선언’(마태 5,1-12)을 통해 당신이 이루시려는 하늘나라를 공포하시지요. 여기서 믿는 이들은 이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상이 부패하지 않게 소금으로, 또 어둡지 않도록 빛으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마태 5,13-16)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법을 새롭게 마련하십니다. 그런데 이 법은 구약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율법을 폐지하고 전혀 다른 법을 제정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섯 가지 율법 규정, 즉 ‘살인 금지’, ‘간음 금지’, ‘이혼법’, ‘맹세’, ‘동태 복수법’,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는 법’에 대한 예수님 당신의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길’을 제시하십니다.(마태 5,21-47) 그렇다면 우리가 새롭게 출범한 하늘나라 안에서 선언된 새 법을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신영복 교수의 글이 생각납니다.“자기 세계로 받아들인 것은 가슴 아픈 일이 되고 자기 세계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골치 아픈 것이 된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다른 이들에게 강요만 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규정에 골치가 아픕니다. 남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규정을 지키는 사람은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니까요. 골치보다 가슴이 아프다면 우리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것입니다.
 
★ 묵상 :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 성당에 다니시나요?

내 가슴에
2월 23일 연중 제7주일·마태 5,38-48

“내 가슴에 손가락질하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내 가슴에 못질하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내 가슴에 비를 뿌리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한평생 그를 미워하며 사는 일이 괴로웠으나 이제는 내 가슴에 똥을 누고 가는 저 새들이 그 얼마나 아름다우냐.” 시인 정호승 님 의 ‘내 가슴에’라는 시입니다. 새로운 해석으로 구약의 율법을 한 점 한 획도 없애지 않고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제시가 ‘원수에 대한 해석’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구약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먼저 제시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이어서 말씀하시는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구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원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 곧 원수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삶에 위험을 가져오는 자들이기에 마땅히 미워해야한다는 ‘자연적인 해석’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원수라는 대상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종교적인 차원, 즉 ‘박해’라는 면에서 언급된 것이 아닐까요? 행복 선언 중 하나인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그리고 지금 원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이 두 가지 사실이 원수에 대한 사랑을 제시한 배경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이라서 그 의미가 작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절대적입니다. 하느님 당신을 무시하며 없애고자 하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분 입장에서 쉽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은 보여주십니다. 엄청난 매질과 침 뱉음을 받으시고, 뾰족한 가시관에 옷 벗김의 수치 그리고 십자가 형벌로 죽음에 이르는 상황에서도 사랑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라는 말씀이 그래서 참으로 어렵기만 합니다. 우선 ‘내 가슴에 똥을 누고 가는 새들’부터 사랑하렵니다.

★묵상 :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가족과 이웃부터 사랑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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