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소공동제 자료(2014년)

2014. 3월 소 공동체 모임
 
 
 
주제 복음 : 구역, 반 모임 주간에 따라 복음 선택 가능합니다. 
3월  2일 연중 제8주일 마태 6,24-34                 
3월  9일 사순 제1주일 마태 4,1-11
3월 16일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3월 23일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3월 30일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시작, 마침성가 : 281번 또는 사순시기 성가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시편 51,3-4)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성녀 베로니카의 수건에 새겨진 예수님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결국 시편 51장에서 찾아낸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을 상본에 써 넣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평화신문, 2006, 97쪽

미세레레(Miserere), 불쌍히 여기소서.

시편 집 4분의 1을 차지하는 ‘개인 탄원 시편’(5-7;13; 17; 22; 25-26; 28; 31; 35-36; 38-39; 42-43; 51; 54-57; 59; 61; 63-64; 69; 70-71; 86; 88; 102; 109; 120; 130; 140-143편) 중 하나인 시편 51편은‘위령기도’(연도)를 통해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노래입니다. 탄원 시편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고, 이어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설명한 다음, 본격적으로 간청하고,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네 단계로 전개됩니다. 교회 전례 안에 애송되면서 ‘참회 시편’으로 불리는 일곱 개의 기도(6; 31; 38; 51; 102; 130; 143편) 중 하나인 시편 51편은 다윗 임금이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를 빼앗은 사건(2사무 11-12)과 연관됩니다.

나탄 예언자는 작은 암양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이웃에게서 그 암양을 빼앗아 자신의 손님을 대접한 부자를 이야기하면서,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12,7)라고 다윗의 잘못을 질책합니다. 이에 다윗은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라고 자신의 잘못
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나탄을 보내심으로써 다윗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자애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윗의 삶의 모습과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품위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인간이기에 혹시라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곧바로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알면서도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부정하는 것은 더 악한 행위입니다. 죄에 대한 고백은 하느님의 용서와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을 통해 죄 중에서의 오랜 방황을 마치고 하느님께 돌아온 뒤에 얻게
된 용서와 은총을 노래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애에 따라 자신을 살펴보고,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한평생을 착한목자로 살기 위해 매 순간마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부족을 고백하려는 마음에서 시편 51편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씀을 서품성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온 작은 아들을 받아들인 아버지처럼 당신께 돌아가는 우리를 언제나 환영하시는 주님께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라고 간청하며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시편 51,19)로 봉헌하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 그리스도교가 팔레스티나 본토 밖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과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 사이에 퍼져가면서 주로 그리스어 번역본을 사용하였고, 또 성 예로니모가 그리스어 번역본을 참조하여 만든 대중 라틴어 성경(불가타)을 표준 성경으로 전례서에서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에 대한 관심 증가와 더불어 히브리어 성경의 가치가 강조되면서 <성경>은 히브리어 시편의 번호를 따르면서 그리스어 시편의 번호를 괄호 안에 적어 놓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기
3월 2일 연중 제8주일·마태 6,24-34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는 말처럼 봄의 아지랑이가 눈을 어지럽히는 계절입니다. 누를 수 없는 들뜸의 시간에 새싹들은 그렇게 땅을 뚫고 일어섭니다. 자신의 무게에 짓눌려 피어나지 못하는 꽃이 없듯이 이 계절에는 우리의 삶도 기지개를 펴고 활짝 깨어났으면 합니다. 새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설렘과 기대를 간직하고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현실에서 느끼는 힘겨움과 고통의 무게보다 상상 속에서 만드는 걱정과 두려움의 무게에 더 짓눌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느라 생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한 것이 우리 삶일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예수님께서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봄날은 기분 좋은 들뜸이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잠시 내려놓고 예수님 말씀처럼 오늘을 느끼고 오늘을 호흡하고 오늘을 살아보았으면 합니다. 짧은 봄날이지만 마음에 담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호사는 우리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말입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딛고 일어서는 삶
3월 9일 사순 제1주일·마태 4,1-11

어느 시인은 “마음을 빼앗겨야 사막을 건너갈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맨 정신으로 살아가기 버거운 것이 삶일지 모릅니다. 인생이 사막에 비유되는 까닭은 그렇게 황량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막과 같은 인생사에서 아름다운 무지개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사막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마음은 그리움의 뭉게구름을 끝없이 피어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십니다. 40일을 단식하신 예수님에게 악마가 달콤한 유혹을 합니다. 유혹이란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그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에게도 그것은 비껴갈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혹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온전한 인성을 취하셨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욕망의 크기만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빼앗겨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니 그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직립보행이 여타 동물과는 다른 삶을 가능케 했듯이 오늘 우리 삶도 그렇게 하느님 말씀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 없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 숙명적인 인간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광야로 나아가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3월 16일 사순 제2주일·마태 17,1-9

일찍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스스로 상처 입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상처 입힐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상처는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엄격함과 냉혹함에 상처 입어온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세상이 내게 관대하게 대할 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은 세상이어서 그렇게 무심한 낯빛이었지만, 그 무심함에 받은 상처를 내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보여줍니다.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임박한 십자가 죽음 앞에 일어난 변모 사건은, 세상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지만 결코 죽일 수 없는 그분 신성에 대한 말씀이고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우리를 자신들의 잣대로 단정적으로 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짓이고 그것에 상처 입거나 주눅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웠지만 단 한 번도 잘못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말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고, 믿는 대로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고귀한 신성을 믿는 한 우리가 그분 마음에 드는 자식이라는 것은 절대 훼손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자기 존재의 존귀함
3월 23일 사순 제3주일·요한 4,5-42

쓸모없다고, 잡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은 쓸모없고 잡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것도 아닌 사람이, 스스로 쓸모없다 말하고 잡스럽다고 말한다면 그 무모함은 어디에 써야 할 지 답이 없습니다. 뭇 생명에 대한 쓸모없음과 잡스러움을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새로운 삶에로 초대됩니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아오느라 자신마저 함부로 대하며 살아왔지만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빛을 만난 것이 그녀에게는 자신의 존귀함에 대한 새로운 일깨움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서 구원이란 이렇게 자기 존재의 존귀함을 깨달아 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의 숱한 멸시와 모함 속에서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그 존귀함을 자각하는 것 말입니다.

일찍이 우리 초대 교회에 순교자 중에 백정 신분을 가진 분이 계셨습니다. 배교하면 잘 살게 해 주겠다고 회유하는 자들에게, ‘내가 믿는 이 신앙에서 이미 천국을 맛보았는데 더 무슨 천국이 필요하냐?’는 취지로 거부했다고 합니다. 천민인 자신에게 양반들이 형제라 말해 주는데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자기 존재의 존귀함을 자각하며 뭇 생명을 향해 형제라 말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말입니다.

연잎처럼
3월 30일 사순 제4주일·요한 9,1-41

감당할 수 없는 물을 담아두는 연잎은 없습니다. 우리 삶도 때때로 그러했으면 합니다. 아마도 고해성사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물을 간직하지 않는 연잎처럼 끝내 죄로 인해 질식당하지 않도록 우리 죄를 씻어 내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사회적 성공이나 육체적 건강함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그에 반대되는 것은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던 시대의 이야기지만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의미심장합니다. 죄에 대해서 단죄만을 생각하던 시대에 죄조차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자기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은총이라고 말하는 이유일 겁니다.

살다보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해 단죄와 심판으로만 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이기도 합니다. 해서 감당할 수 없는 물을 담아두지 않는 연잎처럼 죄를 담아두는 어리석음을 피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때때로 죄조차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죄는 나쁜 것이지만 하느님 은총을 체험하는 데 그것만한 것도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 우리 신앙이니 말입니다.

이어 사도신경 마지막 부분 묵상입니다.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지난 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신앙의 해’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다섯 가지 표어(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교회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미사로 하나 되는 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에 따라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말씀으로 신앙생활의 씨앗을 심고, 기도로 물주며, 교회 가르침으로 잡초를 뽑고, 미사로 양분을 주어, 사랑으로 열매를 거두고 나누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런 우리 삶의 노력 밑바탕에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는 신앙의 모든 교리가 신경 안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신경의 말씀을 새기고, 성경과 비교하여 조목조목 하나하나의 기본적인 뜻을 깨닫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경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에 담겨 있는 모든 계시의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신앙의 해’ 동안 신경의 말씀을 새기면서, 믿음을 키우며, 희망을 다지고,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주님, 저는 믿나이다. 아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나이다(천주존재).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나이다(강생구속).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심을 믿나이다(삼위일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 때 영원한 삶에 들어갈 수 있음을 믿나이다(상선벌악).

이렇게 우리는 믿음을 고백하면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종말의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날이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는 아버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그날이 꼭 오리라는 것을 믿고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기다립니다. 그날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하루하루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을 긍정적으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일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일상 안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로 바쳐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 영원한 삶이십니다. 아멘.’
 

| 쉽게 읽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가톨릭교회 교리서 1020항~1065항>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는 죽음을 앞둔 그리스도인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하고, 병자성사로 성유를 이마와 두 손에 바름으로써 용기를 주며, 노자성체로 그리스도를 모시게 하고 평화를 빌어줍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죽음 후에 우리는 곧 자신의 행실과 믿음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각 사람은 죽자마자 개별적 심판을 받아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거나,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 보기 때문에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1023항)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와 천사들과 성인성녀들과 함께 하는 하늘나라는 인간의 목적이며, 평생을 통한 간절한 기도의 열매로 가장 행복한 상태입니다. 믿음 안에 살았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며, 이는 단죄 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도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렸으며,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와 보속도 권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11월은 위령 성월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합니다. 아직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이 빨리 정화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고 기도하는 신자들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기를 자유롭게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 결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이웃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중한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중한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는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1033항) 말합니다. 죽을죄의 상태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을 겪습니다. 지옥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하느님께 맞서고 끝까지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앞서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는 각 사람이 지상 생활 동안 착한 일을 하였거나 이를 소홀히 한 일의 마지막 결과까지도 드러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보여줄 것입니다. 종말에는 하느님 나라가 완전하게 올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후에 영광스럽게 된 의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우주 자체도 새롭게 될 것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에페1,10)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세상입니다. “히브리말의 아멘은 ‘믿다’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 어원은 견고함, 신뢰성, 성실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이라는 말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1062항) 성경 안에서 하시는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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