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소공동체 자료

2014. 5월 소공동체 모임
 
 
 
주제 복음 : 구역, 반 모임 주간에 따라 복음 선택 가능합니다.
 
5월  4일 부활 제3주일 루카 24,13-35
5월 11일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5월 18일 부활 제5주일 요한 14,1-12
5월 25일 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

시작, 마침성가 : 성모성월 또는 부활성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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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태에서부터 당신께 맡겨졌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 22,11)

+함께 하는 복음 묵상입니다.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

5월 4일 부활 제3주일·루카 24,13-35

“주어진 일상을 특별하게 다룬다면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늘 사순절과 함께 시작하는 봄날이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부활조차 기다려 온 시간에 비하면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 ‘봄날은 간다.’라는 유행가를 노래하고는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봄날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새삼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봄날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함께 한 추억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미 예수님의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봄날은 되돌아갈 수 없는 날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내한 시간에 비해 누릴 수 있는 부활은 늘 짧게만 느껴집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듯한 느낌 속에 빈 무덤은 부활의 상징이 되기는 했어도 삶의 나침반이 되지 못한 채, 망각의 강물에 흘려보내지는 느낌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처럼 당연하게 너무나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익숙해져 누릴 수 있는 부활을 누리지 못한 채, 봄날은 간다는 말처럼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봄인 부활 또한 누려야 할 것이기도 합니다. 빵을 나눌 때 알아보았던 제자들처럼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 가는 봄이 아닌 누리는 신앙의 봄으로 말입니다.

부르심, 하느님 동반자로서의 행복

5월 11일 부활 제4주일·요한 10,1-10

꽃이 예쁘다고 끝까지 품고 가는 나무는 없습니다. 꽃을 떨어내어야 열매가 맺히는 법이니 말입니다. 한때는 꽃이길 바랐으나 떨어짐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모든 존재의 숙명인 것처럼,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들 또한 꽃이기를 바랐지만 끝내 꽃을 고집하지 않고 떨어짐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습니다. 향기 없이 시간을 지탱하는 조화보다 못 생겼어도 향기 있는 꽃이 진정 아름다운 것처럼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은 삶의 외투가 아니라 고독하지만 진실한 사랑을 향한 몸부림을 그래서 늘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면서 성소 주일입니다. 분명 우리 신앙은 성직자의 거룩함이나 수도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 땅에 그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하나같이 허물없이 살아가기를 기도한다고 해도 결코 그런 일은 현실이 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께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성소가 많아지기를 기도하는 까닭은 하느님 은총의 한 자락은 언제나 늘 그 누군가를 통해 지상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능력이나 재능 기부쯤으로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소란 능력이나 완성품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 속에 선택되어지는 동반자로서의 행복이니 말입니다. 행복을 꿈꾸는 사람은 많아도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적게만 보이는 오늘날, 꽃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꽃보다 좋은 현실을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하느님의 부르심이라 말해 주고 싶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

5월 18일 부활 제5주일·요한 14,1-12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는 겨울의 끝자락에 남겨 두시고 당신 부활은 화창한 봄날에 실어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부활이면 매정하게 떠나온 겨울에 대한 미안함만큼이나 예수님 수난과 십자가로부터 너무 빨리 도망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산다는 것은 때때로 이렇게 미안함을 달고 살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미안함조차 간직하지 못했다면 그 뻔뻔함에 우리조차 질렸을지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많이도 답답하셨을 겁니다. 제자들조차 당신에 대한 믿음이 이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 편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처럼 분명한 것도 없지만 제자들 편에서 그것처럼 받아들이기 버거운 말씀도 없었을 겁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 사랑을 안다고 해도 믿음은 내 존재에 대한 포기 없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순교 성인들께서 걸으신 그 길이 그래서 위대합니다. 적어도 순교자들은 사랑의 달콤함을 넘어서 전적인 자기 포기를 통해 하느님께 절대적인 믿음을 드러내셨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에 순교의 이정표가 세워진 까닭일 겁니다. 해서 기도는 은총에 대한 바람으로 시작되지만 당신께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

5월 25일 부활 제6주일·요한 14,15-21

길 없는 그 길에 길을 낸 이는 위대합니다. 하지만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이들 또한 위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는 것은 그래서 예수님만큼은 아닐지라도 예수님께서 다다르신 그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갈 겁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를 만든 이유가 아닌 것처럼 우리 신앙은 예수님 믿음에로 초대된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에로 초대되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전례만이 아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예수님을 마주해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대변되는 당신 계명은 사랑이라는 달콤한 언어로 받아들이기에는 감당하기 힘겨운 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입가에 맴도는 언어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온 삶으로 그 진실성을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일 겁니다. 인간 의지만으로 그 계명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세상에 선한 것치고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면 천상에 이르는 그 길 또한 분명 버겁기 이를 데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 길에 함께하는 보호자로 인해 버겁지만 그렇게 우리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버겁겠지만 다다르지 못할 길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함께 읽는 계시 헌장입니다.

하느님 계시의 전달Ⅱ
(계시헌장 9~10항)

✚ 9항 _ 성전과 성경의 상호 관계
성전과 성경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 통합니다. 성전과 성경 두 가지 모두 ‘하느님의 계시’라는 똑같은 기원과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에게서, 성전은 그리스도와 성령으로부터 유래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총서)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기록되었으므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말씀’은 성전으로 후계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됩니다. 후계자들은 진리의 성령에게서 빛을 받아 설교로 그 말씀을 충실히 보존하고 해설하며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오로지 성경만으로 모든 계시 진리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9항) 그러나 성경 이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트는 ‘성경만’이라는 원칙을 내세웁니다. 성경에서 증명되지 않는 가르침은 오직 ‘인간의 권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신·구약성경과 함께 사도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전승들 곧 성전에 대해서도 똑같은 애정과 존경으로 받아들이고 공경할 것을 선포’(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총서)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나 성모 승천 등 성모 신심에 관한 교리는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전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 10항 _ 성전과 성경의 온 교회와 교도직에 대한 관계 성경과 성전에 포함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때때로 중요한 보물에 비교됩니다. 보물은 신중히 보존하고 손상하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무엇을 빼거나 더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물을 감추어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탈렌트 비유’(마태 25,14)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맡긴 물건’이며 주인은 그 ‘맡긴 물건’에서 이자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양식’(루카 12,42)에도 비유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직접 각 사람의 자의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손 안에서 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총서 참조)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도권은 하느님 말씀 위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봉사합니다. 이 권한은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경건히 듣고 거룩히 보존하고 성실히 해석합니다.(10항)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만을 주시고 교도직을 주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는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인 교회의 교도직을 인정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트의 혼돈된 교의 분열이 그 실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과 성경과 교회 교도직은 하느님의 지극히 지혜로우신 계획에 따라 각기 독립되어 존립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셋 모두 함께 고유한 방식대로 성령의 활동 아래 영혼의 구원에 효율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이 명백합니다.”(10항)

1. 성전과 성경에 대한 설명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은?
① 성전과 성경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통한다.
② 성경은 성령에서, 성전은 그리스도와 성령에서 유래한다.
③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기록되었다.
④ 교회는 오로지 성경만으로 모든 계시 진리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게 된다.

2. 교회 교도직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한 것은?
① 하느님 말씀을 해석하는 직무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
② 교도직은 신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③ 성경은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④ 교도직은 하느님 말씀 위에 있다

3. 성전과 성경, 교도직에 대한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① 성전과 성경, 교도직은 각각 따로 독립하여 존재한다.
② 성전과 성경, 교도직이 모두 함께 고유한 방식대로 성령의 활동 아래 있다
③ 교도직은 성전과 성경 위에 있다
④ 성전과 성경은 연결되어 있으나 교도직은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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