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요, 내탓!
어제 밤에 독서와 복음을 읽는데 학교 다닐 때가 문득 그리워졌다. 정말 고민하면서 지겨웠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제일 좋은 시절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매일 점심 먹고 나갔던 Lake Michigan에서 혼자 걷고, 혼자 음악 듣고, 혼자 생각했던 시간들이 참 좋았는데………
미시간 호수를 바라보며 ‘이 호수가 어제 내가 본 그 호수일까?’라는 철학적 의문도 정겨웠고, ‘그 호수는 호수되, 그 호수가 또한 아니다‘며 도사 흉내 낸 땡초중의 생각도 그립다.
매일 나가며 보았던 그 호수가 어째 그 호수가 아닐까? 어제 본 물은 흘러가고 없으니 그 호수는 아닐 텐데 나도 다른 사람들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늘도 그 호수를 미시간 호수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 호수가 분명 맞기도 하다. 어제 만난 내 친구의 이름이 누구였던 지금 만난 그 친구가 과연 어제의 그 친군지 아닌지도 같은 이유에서 아니기도 하고 또 그렇기도 하다.
어제 저녁 복음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난 이유는 아마도 예수의 고향사람들의 일관된 선입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본 어릴 때의 예수는 어디가고 없는데 그 예수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밖으로 데려가 언덕 밑으로 밀어내고 싶을 밖에…….
허긴 그들이 본 예수가 그들이 만났던 어린 시적의 예수와 같은 인물임엔 틀림없으나, 또 그 예수가 그 예수가 아님을 그들의 고정관념으로 놓치고 말았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나?
그 전에 수도원에서 살 때의 일이다. 아침 새벽미사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와 성당에 앉았는데, 성당 불을 켜 놓아야 한다고 미국 할머니 세 명이 들어와 잘 알지도 모르면서 이것저것 켜보며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혼자의 생각으로 새벽미사 마치고 수도원 성당으로 돌아와 미사를 마친 거룩한 분위기로 기도하려했는데 분위기를 깨버려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다. 피곤한 탓이겠지 하며 애써 웃어 그들을 돌려보내고 이번엔 조용할 것 같은 양로원 성당에 앉으니 평소에 잘 나타나지도 않으시던 할아버지 신부님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일 가지고 불을 켜고 책을 뒤적이며, 기침에, 신음소리에 별 잡음을 다 낸다. 내 깐엔 ‘기도하려면 골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안 보이는 곳에서 하라’는 복음 말씀이 생각나 아무도 없을 양로원 성당에 앉았으나 오늘따라 더 시끄러워 짜증이 겹친다. 나갈까? 말까? 고민하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할머니들이 시끄럽게 하는 것과 내가 기도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기도하는데 옆에서 잡음을 내던 안 내던 그것이 내가 기도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가 피곤해서 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나는 것을 왜 할머니 할아버지 핑계로 그들에게 화내야하는가? 귀를 막아 안 들리면 좋겠고, 눈을 감아 안 보면 좋겠지만, 코를 막아 냄새를 안 맡으면 더 좋겠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리고 보이고 냄새 맡아지는 것이 그들의 탓일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안다는 것이 아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것일까? 선무당이 사람을 잡듯 어설프게 알면서 잘 안다고 믿는 그들의 잘못된 편견이 예수를 잡는다. 흘러간 물이 바다에까지 와서 ‘난 미시간에서 흘러 왔으니 나는 미시간 호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해서 나 같은 짜증의 이유로 이스라엘에 있던 나병환자들이나, 과부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잘 안다고 하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 보다 더한 짓을 서슴치 않았던 편견이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일까?
짜증의 원인은 내 안에 있으면서 그 짜증 때문에 남을 욕하고 있다면 오늘 복음의 고향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믿음은 그런 것이다. 나를 알지 못하면 누구도 알 수 없고, 그분을 알 수 없다면, 결국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내 안에 있던 짜증을 밖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믿음을 밖에서 찾으려하고 있으니…….
내 안에 있는 믿음을 밖에서 찾아 믿으려고 한다면 바늘은 방에서 잃어버리고도 환하다는 이유 하나로 방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밖에서 찾는 것과 무엇이 그리 다를까?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