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자의 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
제가 이곳에 부임한지도 벌써 일 년하고도 한 달이 흘렀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실수와 힘듦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기에 거기에 따른 보람과 기쁨이 적지 않습니다.
처음 이 성당에 부임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기쁨과 동시에 밀려오는 두려움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친한 분들과의 관계였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교구 사제의
인사에는 지켜지는 원칙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출신지 본당으로 는 보내지 않는 것이랍니다. 내가 이곳에서 서품을 받았고
내심 시카고 성당 출신의 사제라고 생각하던 내가 시카고로 온다는 것 은 해서 또 다른 용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성당 사정도 잘
알고 많 은 신자들과도 친분이 있어서 출신지 성당이 사목을 하기에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알기 때문에 쉽게 오해하고, 알기 때문에 필요한 것들도 많아지고,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지기에 쉽지 않겠지요.
누구나 좋은 시절에는 서로에게 잘합니다. 그런데 신자들과 사목 자간에 의견이 대립되고 갈등이 빚어질 때 인간적으로 잘
안다는 점이 장애요소로 작용합니다. 사목자로서의 전문적인 안목과 고민을 거듭한 숙고에 의해 결정된 사항도 인간적인
경험과 친분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출신지 본당으로는 사제를 발령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행복하게도 출신지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일을 겪으셨지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고 그 권위에 사람들은 감탄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금의환향하듯 오랜만에 고향 나자렛을 찾으셨습니다.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하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권위 있는 말씀에 탄복하면서도 수군거리기 시작합
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4,22)
고향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자란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청년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엔 구원자 예수님은 안계시고, 그저 함께 먹고 놀던 아이시절의 예수만 있을 뿐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런 배타적인
행동을 보시고“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4,24)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발길을
돌리십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시대나 사 제의 출신지 본당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성당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녀는 인간적인 능력에 의해서 그 직분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계셨기에
지금의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인데도 말입니다.
예레미야서는“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1,5)고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뽑아 세우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또 출중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응답했을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해서 사제는
개인의 능력이나 판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이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성직자와 수도자인 셈이죠.
흔히 우리시대를 권위부재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랜 독재 정권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그 후유증으로 권위 자체에 거부
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권위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장의 권위가 없으면 그 가정은 흔들리고 집안이 무너질 테고,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교육이 바로 설 수 없을 겁니다 의사의 권위를 환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병의 치료는 어려울 뿐
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를 국민들이 우습게 여긴다면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는 반드시 지켜지고
존중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권위가 없는 성당은 신자들이 불행합니다. 물론 그들의 권위는 복음적인 삶에서 비롯되어야 하지요.
참으로 좋은 공동체는 신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고 믿으며 그 이야기 한 마디 한 마디를 깊은 뜻으로
마음에 담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 때 신자들은 행복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 또한 그런 신자들의 기도 와 믿음
속에 성화되어 더욱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우리는 복음적인 공동체라고 이야기 하고 이런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기적은 이루어집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지요.
올해는 봉헌생활의 해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거룩하고 축성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오늘 쓴 글이 친한 분들과의 관계가 서먹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와는 더 친하고 또 누구와 는 덜
친하다는 말씀으로 쓴 글도 아닙니다. 며칠 전 복음을 읽다가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예수님을 읽으면서 문득 사목자의 변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속마음은 여러분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모두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 Fr .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