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참으로 시끄럽습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과 박순실 게이트로 시끄럽고, 대구에서는 대형 화재로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와중에 대통령의 짤막한 방문이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해 시끄럽고, 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평화적 시위를 벌이긴 하지만, 대통령의 조건 없는 하야를 외치고 있어 시끄럽고, 정치하는 분들은 거기에 슬쩍 끼어들어 그들에 맞는 셈을 계산하며 자기의 이득이 무엇일까를 고민 하고 있어 마음이 시끄러울 것입니다. 허탈과 분노를 넘나들게 하는 걱정과 외침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합니다.
미국 내에서는 백인들을 중심으로 소수민족에게 가해지는 분노와 폭력으로 시끄럽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하고 노래하지만 자기들의 잇속을 먼저 차리는 성탄 장사로 시끄럽습니다. 모든 일들이 국민을 위한 일이였음을 강조하고 그것은 그저 실수이지 내 죄가 아니라고 발뺌하는 지도자의 모습에서 "촛불을 바람 앞에 꺼진다."는 말과 함께 "이 또한 지나가지 않겠나"하는 그들의 희망을 보며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도 매우 시끄럽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회개할 것이 없는데 무슨 회개를 하라는 말이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무엇을 또 어찌 회개해야 하나? 그런 의아함 중에 내가 한 모든 일이 국민을 위한 일이기에 옆의 사람의 잘못한 것이지, 나는 그저 실수였다는 대통령의 마음이 행여 내 마음은 아닐까 싶어 깜짝 놀랐습니다.
종말이 가까워지면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난다는 것이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민간신앙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죽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사라졌다 (2열왕 2,11)고 합니다. 그렇게 사라진 분이 메시아가 오시기 전, 백성들을 회개시키려 다시 온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 예언자라 합니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마태 3,3
이런 요한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속죄양으로 선언합니다. 이런 논리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오시는 메시아는 이방인을 물리칠 강한 힘의 구세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덕에 세상을 편하게 살아보려 했지만 그것은 메시아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요한의 이름을 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의 관습도 그렇습니다만, 당대에는 새로 태어나는 자녀는 대부분 아버지의 이름을 따릅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 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 불러야 합니다.”(루카 1,59-60) 하며 반대합니다. 요한의 어원은 요하난입니다. 주님을 나타내는 요(yo)와 은혜를 뜻하는 하난(hanan)이 합쳐진 합성어 입니다. 직역하면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셨다는 뜻 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태어난 요한이 말한 회개는 생활양식을 바꾸는 아니 근본적으로 생각까지 바꿔야 하는 회두(回頭)였습니다.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마태 3,8) 즉 요한의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전환까지 포함한 회두(回頭) 입니다.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오던 룻의 아내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자기의 것만 생각하고 옛것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면 자기의 욕심으로 가득찬 소금 기둥 (짠순이, 짠돌이)이 될 뿐이라는 경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죄는 무엇일까요?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 입니다. "내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자리 없네"라는 노랫말처럼 나로 가득차 욕심에 사로잡히면 소금처럼 짜게 되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죄의 첫 번째 단계는 초조와 불안입니다. 죄로 인해 자신이 고발 당하고 노출 당했다는 것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 불안하고 초조해 합니다. 무엇인가를 잃은 듯한 상태, 즉 하느님을 잃어버렸기에, 삶 안에서 불안과 초조로 쫓기듯 살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도피현상입니다. 이는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감당 하지 못하고 거기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기인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변호하게 되는데 그 변호가 실패하면 자신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로 변하고,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분노가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갖게 되는 것인데 비록 범죄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 위기감을 맞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 하면서부터 원상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 용서를 빌게 되는 첫 출발점이 됩니다. 앞서 본 것처럼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를 얻는데 있어서 회개는 필수적인 것이라 그렇습니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 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이 거룩한 동산에서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들을 몰고 다니리라."(이사야 11,4-6)
이사야예언자가 보았던, 메시아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는 그저 상상의 나라일까요? 힘 있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사는 것도,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는 것도 생각의 전환의 회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정의와 신의가 흐르고, 세상의 피조물들이 서로 화목하여,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고 더불어 어울려 사는 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라 말하고 있기에 우리겐 회개, 아니 회두가 꼭 필요합니다.
요한의 시대와 상황은 매우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소리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세례자요한의 선포는 우리에게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올바른 방법을 찾아 사는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쉽지는 않지만, ‘생활방식을 바꾸어 생활전체에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을 정하는 의미’인 회두(回頭)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벌어졌는데, 잘못한 사람이 없다 한들 모든 것이 묻혀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옛관습과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움으로 갈아입는 회개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례자 요한의 독설 같은 외침이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파는 이유일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김 두진(바오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