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의무
태풍 '하비'가 텍사스주를 강타했습니다. 바로 이어 어마어마한 태풍 '어마'가 다시 카리브해를 강타하며 플로리다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텍사스주를 강타했던 '하비'보다 더 센 바람과 비를 동반한다고 합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태풍은 지구의 온난화로 생긴다고 합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각 나라의 문제를 넘어 온 지구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과 자연을 파괴한 주범인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자연은 큰 한숨과 큰 눈물을 쏟아내고 있나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수록된 다섯 가지 설교 가운데 네 번째인 18장은 공동체의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이상 하지만, 선 과 악의 문제는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큰 위협이 됩니다.
(13장 가라지의 비유 참조) 공동체에는 늘 갈등과 긴장이 존재 하기 마련인데, 마태오는 교회 공동체 역시 같은 상황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옆 사람 한테 마음 쓰지 않는 개인주의자들이 넘쳐나는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을 다룹니다. 교회가 공동체 내의 악을 제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형제자매를 잃어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 단계에 이르는 형제적 교정 (16-18절)과 공동체 기도 (19-20절)를 교회 공동체의 규범으로 제시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18, 12-14)와 ‘형제의 죄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 21-22)는 말씀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공동체와 화해시킬 것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18,15). 형제에게 충고하는 것은 유다교의 오랜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구성원 누구 하나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오류에 빠진 형제를 회개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 우선 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에서 형제가 저지른 죄란 공동체 생활을 방해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 대상이 나라면 내가 그 사람과 먼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그에게 잘못을 지적해 줄 책임이 개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이목을 피하여 단 둘이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훈계조의 말은 사람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뿐 더러 상처로 남을 뿐입니다. 먼저 그 형제의 입장에서 충고하되, 그의 태도로 나에게 준 상처와 고민을 솔직히 얘기해야 합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15). 그와 나 사이에 관계가 형성된다면 나는 그를 되찾는 것이고, 그는 공동체의 친교를 다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형제에게 충고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와 대화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16). 신명기의 가르침대로 둘 또는 셋이 다시 함께 대화합니다.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잘못과 관련하여, 그의 어떤 죄나 잘못이든지,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된다.”(신명 19,15) 주변에 도움을 청하여, 사적인 견해가 아니었음을 다른 믿을 만한 형제들의 도움으로 대화해야 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여럿이서 한사람을 몰아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그가 마음을 닫고 다른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공동체에 알립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17) 이는 공동체가 그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불행하게도 불순한 의도로 형제자매들을 괴롭히고 공동체를 등지고자 했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 온 공동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겠지만 도무지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물의를 일으킨 행위가 교회의 규정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가름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공동체의 규범을 받아들인다면 공동체가 그를 얻겠지만, 규범 자체를 거부한다면 그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해야 합니다. 두 주일 전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다시 들려집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 교회가 구속력 있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예수님께서 교회에 위임한 이 풀고 매는 권한에서 비롯합니다. 이 권한은 베드로뿐(16,19) 아니라 교회 전체가 받았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용서하고 보류하는 권한은 기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아 죄인을 위해 기도 한다면 회개할 것입니다. 즉, 공동체의 기도로 가능하다는 약속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 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예수님의 마음 가져야 합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복음을 실천하는 것을 인간관계 안에서 찾는다면 그 공동체는 한 사람도 잃지 않을 겁니다. 약한 이들과 못난이들을 돌보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며, 죄를 지어 자신을 잃고 이웃과의 관계도 깨진 이들을 다시 얻고자 애써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기 싫어 서로에게 잘못을 인정하라고 소리 높이는 공동체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아닐 겁니다. 남의 허물에는 앞 다투어 삿대질을 해대기 전에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자만을 버려야 합니다. 공동체 삶 안에서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를 권장하십니다. 죄인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던 예수님처럼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느님 자비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아무도 내치지 않으십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은 하느님의 사랑과 형제자매들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참된 형제애란 다른 이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두고 보지 않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일입니다. 힘겹게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20)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