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새해 대림 1주일을 맞이하면서……

 

 

 

 

 

교회의 새해 대림 1주일을 맞이하면서…..

 

 

교회의 전례력은 기다림으로 새롭게 시작합니다. 대림절은 글자 그대로 임할 것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곧 재림이고, 다른 하나는 구세주로 오시는 성탄의 아기 예수님입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미국의 강경대응으로 어수선합니다. 더욱이 북한의 미사일은 미전역을 사정권으로 둘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또한 유명한 휴양지인 발리의 화산 폭발 사태, 멕시코 지진, 포항 지진, 이런 일련의 사고들이 종말을 예고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습니다.

 

마르코복음 13장은 수난 이야기앞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내려다보시며 종말에 관한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시면서(13,1 -­2), 종말의 전조로 가짜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전쟁과 기근, 지진과 교회 박해 등 작은 불행이(5­13절) 이어지다가 종말이 임박할수록 훨씬 더 큰 불행들이(14­23절) 밀어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결국 종말에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에 싸여 내려와 온 세상의 선민들을 모아들이실 것입니다. (24­ -27절).

예수님의 이 설교는 표현상으론 묵시문학적 색채를 띠고 있으나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 사건을 들추어내는 것보다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경고와 위로가운데 회개와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입 니다.

 

묵시문학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모습을 임금님의 행차처럼 묘사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묘사일 뿐 하느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의 재림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루카도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장소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 -­21) 종말은 무화과나무의 새싹이 여름을 예고하듯이, 여러 가지 조짐 가운데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그러나 종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때는 예수님도 모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명과 영광까지도 아버지께 맡기고 순종하셨습니다. 스승도 모르는 것을 제자들이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습니다. 기실 당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서 종말을 목격할 줄로 믿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그렇게 생각하다가

55년경 필립비서를 집필 할 때부터 생각을 바꾸어 예수님의 재림 전에 자기가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을 눈앞에 닥친 사실로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것이라는 예고가 세 번 등장합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마태 10,23) “여기에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13,30)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라고 예수님께서는 네 번에 거쳐 거듭, 거듭 촉구하십니다. (마르 13,33.34.35.37) 이는 제자 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37절)으로서 ‘그날과 그 시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단순히 육신의 고단함에 빠져 잠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지혜 6,15; 시편 127,1­2 참조)

세상의 거짓 평화에 안주한 어둠의 삶이 아니라 청명한 정신으로 바른 삶의 자세를 주도해 가는 빛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빛의 열매를 맺으며 주인이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신 대로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루카 12,36) 기다림의 자세를 지닙니다.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준비하는 운동선수 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그분이 누구인지 그 기다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주인이 먼 길을 떠나 있다 해도 ‘맡겨진 권한과 소임’에 충실한 오늘을 살아갑니다. 지난 일에 매여 오늘을 놓치지 않으며 허황된 미래에 오늘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불평하거나 게으르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기뻐합니다. 그리하여 빛의 자녀는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니다.” (1테살 5, 8) 그리고 신랑이 언제 어느 때 오신다 해도 맞이할 수 있도록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여 사랑의 불꽃을 밝히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마르 13,36­37)

 

우리는 문지기입니다. 문지기가 잠에 빠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깨어 있는 존재, 곧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충실히 주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없으면 구원 기회를 놓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오시어 고요를 깨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에 들어오려고 기다리는 모든 생각이 유익한지 해로운지 묻고 따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각인지 오염된

세상에 안주하려는 생각인지는 깨어 있어야만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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