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파타! (열려라!)
열림은 누구에게나 중요합니다. 지난 화요일 우리 성당 앞에서 수도 공사를 했습니다. 물이 없으니, 더운 물도 못쓰고 음식을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다행이 생각보다 공사가 길지 않아 물이 나오게 되었는데, 얼마나 마음이 시원하던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린 음악회, 열린 교회, 열린 마음 등등…….. 열림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열렸다 하면 무엇이 열렸던 간에 좋은 뜻이기에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주일 복음에서 닫힌 귀를 열어주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람 몸의 모든 기관이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귀와 입은 즉,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듣지 못하면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입술을 보고 읽는다 한들 들어 본적이 있어 언어를 배운 사람이면 몰라도 한 번도 언어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면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입술을 읽어 낼 수가 없겠지요. 가정에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버지의 언어 습관이나 어머니의 말하는 습관을 배워 말하는 것처럼 듣는 것은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한국말처럼 하지 못하는 이유도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이 듣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기에 배울 기회가 줄어서입니다. 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귀가 뚫렸다는 것은 말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옛 말에 손과 발은 복을 벌어들이는 일을 하고, 입은 그 복을 까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손과 발이 벌어들인 복을 까먹지 않으려면 신중하게 입을 놀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귀먹은 벙어리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입이 근질거린 사람들은 그들에게 명하실수록 소문을 더 많이 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더 이상 드러내놓고 사람들을 만나실 수 없었고, 큰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입이 복을 까먹은 형국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평소에 당신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고 전합니다. 해서 어쩌다 누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때에는 곧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이는 스승이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 말씀해 주시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큰소리를 지르시면서 숨을 거두신 장면을 본 군인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라는 고백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마르코 복음은 알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은 벙어리를 치유하시는데 보통 때 와는 매우 다른 행동을 하십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 하나를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넣었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시대 청각 장애인을 치유할 때, 사람들이 흔히 하던 동작이라고 합니다.
기름, 술 혹은 침과 같은 액체는 치유의 효력을 지녔다고 믿던 시대였지요. 우리도 옛날에는 모기에 물리거나 가려운 곳이 있으면 침을 바르면 낫는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손가락을 환부에 대는 것은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기를 넣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는 것은 하늘에서 기의 힘이 내려오도록 하는 동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시대 치유하는 사람들과 같은 행위를 하시며 예수님께서 그 장애인을 고치셨다고 전하는데, 이는 우리가 들은 제 1독서의 이사야 예언서(35,5)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들이 한 말을 전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즉, 예수님은 예언서가 예고한 구원적인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과 사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좋은 말씀, 즉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서 죽음의 말을 내 뱉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때문에 생긴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신비스런 이론도 아니고, 하느님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하겠다는 야망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고 난 후의 내세를 위한 안전대책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일을 실천하였듯,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을 배워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안에 머물게 하려는 삶의 운동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 그분의 돌아가심 이후,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긴 것이 바로 우리가 읽고 듣는 복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 안에 그들이 해방과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실천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체험하였고, 그런 체험들은 그들에게 기쁨이 되었고, 그들은 체험한 기쁨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읽고 배우고 살려고 하는 복음서들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열린 귀가 있다면 우리가 하는 말씀들도 생명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아직 복음에 열리지 못한 귀를 열어주시고자 하늘의 기운을 받아 한숨을 내쉬며 외치신 "에파타!"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는 소리여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소식을 전하지 못함은 먼저 우리가 복음의 소식을 들어내지 못함이 아닐까 반성하며 매일 우리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듣지 못함으로 말하지 못하는 우리의 장애가 예수님의 "에파타!"의 소리로 열려 복음을 전하고 살아가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 좀 들어라 하시며 듣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에파타! (열려라!)하고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들으라고, 기쁨의 말씀을 들은 대로 외치고 그 기쁨을 살라고 우리를 향해 외치십니다. "에파타!"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