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현양 대 축일을 지내며……

 

 

 

 

 

십자가 현양 대 축일을 지내며……

 

 

십자가상에 한 사람 있네. 왜 죽으셨는지 말해다오.

십자가는 치욕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치욕을 당하셨습니다. 왜 죽으셨을까?  원래 십자가는 옛날 로마나 유대아, 이집트등 지중해 연안지방의 나라에서 극악무도한 죄인들이나 국사범들을 처형하던 사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시고 난 후, 사람을 죽이던 도구였던 십자가의 의미가 사람을 죽이는 형틀에서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아들이신 그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였고, 마지막 힘을 빼앗는 도구였으며,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서너 시간 만에 죽게 만든 도구였습니다. 그런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시면서, 생명을 전달하는 도구로 의미가 바뀌게 됩니다. 물론 세상의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서 3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인도자, 모세의 지시를 따라서 이집트를 탈출했던 히브리백성들이 한 달이면 넉넉히 도착 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꿈꿔왔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정착’하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맨 것은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는 선택을 아주 현명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그 결과를 볼 때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부분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전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오랜 세월 전, 광야에서 겪었던 ‘불 뱀 사건’을 회상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같은 길을 가실 것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올바른 의미를 알아들으면 영광의 상징이 되겠지만, 그 전에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치욕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이런 선언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십자가는 참혹한 형틀이 아니고 우리 인생에 참다운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주님의 십자가는 상상도 할 수 없고, 또한 갈바리아 산상에 우뚝 세워진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류 구원이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니 모든 사람들을 죽도록 사랑하셨는데, 왜 죽음이 그분을 가로막았을까요? 십자가는 그래서 의문투성입니다. 신학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이해하는 것은 이론적이지만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려면 의문에 의문투성입니다. 왜, 왜, 왜?

 

911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특히 제가 뉴욕에 살 때 많은 이들은 아직도 911의 슬픔을 간직하고 삽니다. 쌍둥이 빌딩이 보였던 다리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촛불을 켜고 희생자들을 기억합니다. 그 때에 다친 사람들이 아직도 그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멀쩡하게 출근하겠다고 웃고 나간 아들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딸이 그들과 아무런 상관없던 폭력에 돌아오지 못하고, 사람들을 구하려 했던 경찰관들과 소방대원들이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왜, 왜, 왜? 서류미비자라고 부르던가요? 이 땅에서 살기 위해 밤과 낮을 바꿔가며 열심히 일해도 자녀들이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늘 가슴 졸이며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들이 또 외칩니다. 왜, 왜, 왜? 건강만큼은 자신 있게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앞뒤 안보고 열심히 일해 이제는 조금 살만하다 싶었는데 청천병력 같은 병으로 죽음 앞에서 외칩니다. 왜, 왜, 왜?

 

십자가는 이론이 아닙니다. 신학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온 몸으로 알아내야 합니다.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가 액세서리는 되지만, 우리의 신앙 안에서 십자가는 결코 액세서리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의문이고 치욕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치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목에 걸 자격도 없습니다. 그저 말로만 하는 십자가의 의미가 과연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이라 하자니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저 높이 들려진 십자가 앞에 엎드려 의미를 알게 해달라고 조르는 수밖에 없나 봅니다. 왜, 왜, 왜? 라고 외치는 이웃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답답해 할 수밖에 없는 내가 부끄럽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외치는 그들의 울부짖음에 함께 달리신 그분의 치욕과 부끄러움, 그리고 고통과 어려움 만 바라볼 뿐, 어찌 동참해야 하고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저의 무지가 답답합니다.

 

우리의 자동차 앞에 걸려 있는 십자가가 내가 천주교 신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왜?"라고 외치는 이웃의 울부짖음이 더 이상 시끄러운 소음이 아니고, 우리 가슴을 후벼내는 그분의 목소리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달려있는 십자가가 무게는 가벼울지언정 의미만큼은 정말 소중하고 귀하며 무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귀에 달려있는 십자가, 목에 달려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면 차라리 십자가를 걷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을만한 용기와 의지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십자가의 의미에 욕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그것이 자동차 앞에도 걸려있고, 우리들 목에도 걸려있고, 우리 귀에도 달려있지만, 그 의미는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왜, 왜, 왜? 라고 외치는 이들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는 이웃 안에 숨어계신 그분의 외침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 치욕의 십자가가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고 구원의 십자가임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보라 십자가 나무 여기에 세상의 구원이 달려있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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