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연중 30주일인 오늘 복음은 에리코의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와의 이야기입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중에도 그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칩니다. 체면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이 그저 외치는 소경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난, 바르티매오는 정말로 운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말 몇 마디 소리치고, 못 보던 세상을 보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소리에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비를 얻기 위해 자기의 체면도, 부끄러움도 걷어내고 믿음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내 편안함(Comfort Zone)에 머물러 있으면 볼 수 없는 것들 즉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로매오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 알았습니다. 세상엔 많은 바램들이 있지만 그 바램들이 기도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집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램을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열심이 자기 안에 갇혀있고, 자기의 욕심에 갇혀있으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내 만족, 내 기쁨을 위해 남에게 강요된 요구가 함께하는 이들에게 같은 기쁨이 될지는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소리쳐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소리만 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소리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조용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것이 가정을 바꾸고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의 간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그는 그전에 보았던 것 들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전에 보았던 사랑하는 사람들, 멋진 세상, 아름다움들………. 그가 보고 싶어하는 것들을 다시 보게 됨으로 기쁨을 찾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것 중에 우리가 지금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 멋진 세상, 그 아름다움들을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혹시 내 안에 갇혀,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 대들보를 보지 못하며 남의 눈의 티만 보는 갇힌 마음이기에 기쁨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나이가 먹어가는 배우자지만, 아름다움과 멋짐은 그대로일진대, 귀염둥이 아이들이 훌쩍 자라나기는 했지만, 사랑스런 모습은 그대로일진대, 그 전보다 훨씬 나아진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왜 그전에 보았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이 눈뜬 소경이 되었을까요? 나이가 먹으면서 노안이 되어 잘 보지 못하는 것들 중에는 글씨뿐이 아니라 예전에 보았던 아름다움도 함께 못보고 살아갑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르티매오는 믿음으로 다시 보게 되는 것 뿐 아니라 구원을 살게 됩니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갇혀 그 욕심에, 그 체면에, 눌려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셨지만, 멸망한 뒤에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이끄시고 지키시는 분이라 오늘 제 1 독서에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유배생활에 빠져 침울해 있던 유대민족에게, 예레미야 예언자는 희망의 소리를 선포했습니다만, 그 희망의 소리가 실현된 때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예언자의 기도도 그가 죽은 후에 실현되었는데 우리의 기도도 그렇지 않겠느냐는 절망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의 약속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우리 모두는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받아들인 신앙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힘들게 살면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하느님이 내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며 시간도 재능도 그리고 노력도 봉헌 할 이유가 없다며 불평하며 신앙 안에서 어둠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요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고 모두에게 구원의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 분이시지만 거기에는 강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갇혀 봤던 것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이 구원도, 기쁨도 그저 멍에로 다가올 뿐 기쁘지도, 슬프지도 못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차지도 뜨겁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우리가 살아낸 그 자유가 방종인지 자유를 위장한 폭력인지는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확연히 들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꾸중을 이겨내고 바르티매오가 외치고 간청했듯이,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좁고 작았는지, 얼마나 닫힌 공간에서 살았는지, 세상이 얼마나 크고 장엄한지, 우리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만큼,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지, 우리가 왜 미래의 희망인지, 우리가 무엇으로 다시 피어날 수 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환해집니다. 갇힌 나에게서 빠져 나오면 눈물나게 환해집니다.
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이는 것처럼 나에게서 나와야 내가 비로소 보입니다. 바르티매오가 외친 것처럼 우리도 외쳐야 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