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아침 먹어라.
오늘 복음에서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시며 초대하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빵과 고기는 그 분께서 전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와 같은 빵과 고기 입니다. (요한 6,9-11 참조) 아주 놀랍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와 오늘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사화의 이야기는 같은 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들 앞에서 빵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면, 또 예수님께서 우리게 따뜻한 아침을 차려주신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영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우리가 부활사건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놀랄 수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부활시기에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에 초점을 두는 독서들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가르치는 것은 이 신비의 두 가지 측면, 즉, 부활하신 주님의 놀라우신 기적과 그로 인해 우리가 살아야 할 변화된 삶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이 들어있습니다.
묵시록에 의한 제 2독서에서 요한은 "권능과 부, 지혜와 힘, 명예와 영광과 축복"을 받은 어린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양은 티베리아 호수가에서 자신을 들어 내 보이신 똑 같은 양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지금 그 분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그들에게 아침식사를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 중 누구도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을" (요한 21,12)정도로 확실히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왜 그 분께서는 죽음에서 일어나신 후 지상에서 머무셨을까? 다른 말로 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바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시지 않고 어부들을 다시 불러들이시며 만나고 계신 것일까? 이유인즉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해야 할 일을 맡기시기 위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워하는 제자들을 먼저 먹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들을 먹이시오…….내 양들을 돌보시오…….내 양들을 먹이시오." 성서 구절에서는 이 임무가 베드로에게만 주어지지만, 사실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실 교회 지도자로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혼자만이 그 일을 떠맡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당의 예를 들어보면 본당신부 혼자 사목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목평의회 위원들, 교육, 전례 또는 그 외 다른 교회 봉사직을 맡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배고파하는 군중들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도와 배불리게 하는 사도들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제 1 독서인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대담한 선포를 통해 가르치고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로 다시 난 그리스도인 모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세상에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부활을 보지 않고서도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고백은 입으로만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믿음을 증거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백과 그에 따른 행동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던 그렇게 하지 않던 우리의 일상생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외친 소리와 똑 같이 삶으로 외쳐지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하시기에 앞서 얼마나 많은 빵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 (과연 너희들이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마치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구걸하는 가난한 이웃을 보면서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데 내가 한 사람에게 베푸는 작은 선행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혹은 일 년에 한번 부모님께 전화 드리는 것이 과연 효도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족들 안에서도 우리 애들 혹은 아내(남편)에게 이렇게 표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실 소용이 있고 없고는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필요한 이웃에게 할 수 있는 조그만 일 조차 부정한다며 “과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던 안드레아의 불평만 되풀이 하는 것일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우리를 먹이시는 그분의 초대입니다. 방금 잡은 물고기를 굽고, 보리 빵을 주시며 우리를 먼저 배불리 먹이십니다. 성찬의 기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시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성체로 영적인 음식을 먹었으니, 가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몫입니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
와서 아침을 먹어라!"
김두진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