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완성

 

 

율법의 완성

 

오늘은 교황님의 강론 말씀을 먼저 나누고 싶습니다.

시기는 잡초처럼 자라는 추악한 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독서에서 1사무 18,6-9: 19,1-7 다윗에 대한 이스라엘의 임금인 사울의 질투를 이야기합니다.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승리를 거둔 뒤에 여인들이 흥겹게 노래하며 말했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그날부터 사울은 의심의 눈초리로 다윗을 보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기를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윗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 뒤에 아들의 조언을 듣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잡초 같은 나쁜 생각은 다시 찾아옵니다. 이것이 질투입니다. 질투는 "하나의 병"입니다. 질투는 잡초처럼 자라나 시기심을 갖게 합니다.

질투에서 자라난 시기심은 마음가짐이고, 추악한 죄입니다. 질투와 시기는 마음 안에서 나쁜 풀처럼 자라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좋은 풀을 자라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좋은 풀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늘이 좋은 풀을 해칩니다. 질투와 시기의 마음은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마음, 추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죽이기도 하고, 죽음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성서는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악마 통하여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듯 질투를 통해 시기가 들어옵니다.

시기는 우리의 공동체를 죽입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참지 못하기에 언제나 스스로에게 고통을 줍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의 마음이 고통스러운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질투 때문에 얼마나 자주 혀로써 사람을 죽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보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해 시기심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뒷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뒤에서 하는 그 험담이 사람을 죽입니다!"

"저는 성경의 이 이야기를 생각하고 성찰하면서 저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제 마음 안에 질투의 어떤 것, 언제나 죽음으로 이끄는,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시기심의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권고합니다. 이 병은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추악한 죄입니다. 그것은 많은 범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께 청합시다. 질투에 마음을 열지 않는, 시기에 마음을 열지 않는 은총을 주십사고 청합시다.

질투와 시기는 우리들을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기심 때문에 넘겨지셨습니다.

빌라도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마르코는 빌라도는 율법 학자들의 우두머리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꾀가 많았지만 겁도 많았던 빌라도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몬 것이 시기심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청합시다. 시기심으로 본당의,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을, 같은 동네의 이웃 사람을 죽음에 넘기지 않게 하는 은총을 주님께 청합시다. 모든 이들이 죄를 짓고 살지만 덕행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든 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입니다. 좋은 것을 바라봅시다. 나쁜 것만 바라보며 시기와 질투로 뒷말을 하여 사람을 죽이지 맙시다." –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성 아네스 동정순교자 기념일에 하신 강론-

법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난주 소금과 빛을 이야기 하신 후 율법을 해석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넘어 율법의 참뜻을 밝히십니다. 즉,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 정신을 추구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죄를 일으키는 충동에서 단호히 물리치라는 말씀입니다. 즉,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죄를 짓게 하는 눈, 손 따위의 소중한 지체를 버리라는 말씀은 모두 장애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그처럼 단호한 마음으로 죄에서 멀리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교황님의 강론 말씀을 인용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교회로서 어떻게 공동체를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은 사랑을 사는 이들이 넘어서야 할 단호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저 나와 맞지 않는다고, 내 생각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우리의 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이웃임을 각성하자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령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 아니겠습니까?

 

                                                                                                                                          김 두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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