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광고의 사랑 법

 

 

 

 

 공익광고의 사랑 법

 

오늘 복음도 지난 주에 이어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6가지의 명제 중 나머지 3개의 명제를 예수님께서 해석하십니다. 예수님은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 정신을 추구하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들을 챙겨 주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태복수법이라고 하는 이 법은 아직도 중동의 몇몇 나라에서 시행되는 법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정의로운 법 같으나 사실 무자비할 수 있는 법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의 원칙은 많은 모순과 갈등 속에서 점차 퇴색되어 갔다. 즉 랍비들은 모세의 법을 지키려는 결의와 동태복수법의 실행 상 어려움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 강력한 폐기론의 근거는 어떠한 두 사람도 동일한 신체조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동태복수법의 적용은 결코 공정을 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동태복수법은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치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다. 예수께서는 악행과 학대를 당할 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대신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가톨릭 대사전

 

그러나 과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먼저 용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용서조차도 쉽지 않은 일들이 세상엔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용서는 나에게 잘못 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자주 예를 들었지만, 때린 사람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잠을 자는데, 반대로 맞은 피해자는 몇 년이 지나도록 잠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하고 있다면 불공정한 일이고 뭔가 잘못된 일 입니다.

 

이는 잊지 못하는 깊은 상처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상처를 어찌 잊겠습니까?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내게 피해준 이의 죄를 용서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용서는 무엇일까요? 용서는 "의미"입니다. 내게 벌어진 일들의 참 뜻을 찾는 것 입니다. 벌어지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가지고 누가 옳고 그름을 따져 물어 그 만큼 되갚아 주어야 해결된다면 세상은 피로 물든 복수와 보복의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고 함께 하는 이웃은 실수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살벌한 이웃이 될 것입니다. 사실 내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그대로 되갚아 준들 피해자의 마음이 온전히 풀리고 편하게 되지도 않습니다.  즉 보복을 한다고 해서 기쁨이 오거나 마음이 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양쪽의 아픔을 만들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어려운 주문 같습니다. 당신의 오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쪽 뺨도 내어주라는 말씀은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오른 손으로 오른 뺨을 때리려면 어떻게 때려야겠습니까? 손등으로 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경멸하며 때리는 방식입니다. 로마국의 속국으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인들에게 맞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차라리 돌려 맞으면 즉 왼뺨을 내어주면 손바닥으로 맞게 되겠지요. 소심한 방법이긴 하지만, 인격적(?) 대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맞았기에 도로 때려 준 다해도 (동태복수법) 맞은 뺨이 덜 아프거나 기분이 풀어지는 것도 사실 아닙니다. 흥부의 아내가 놀부의 아내에게 밥주걱으로  뺨을 얻어맞자 다른 쪽 뺨마저 돌려댔다는 이야기처럼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은 무엇일까요?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면 차라리 이천 걸음을 그 사람과 가라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연상합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것처럼 로마 군인이나 관리들이 짐꾼이나 길잡이로 부리려고 유다인들을 강제로 징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때 천 걸음이 법으로 정해진 거리였습니다. 그러니 강제로 천걸음을 가지 말고 자발적으로 이천걸음을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겨라!" 하는 말처럼 강요당해 종으로 살지 말고 자발적으로 해줌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말씀의 뿌리에는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동태복수법에 의해 똑 같이 갚아 준들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며, 오히려 모두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겨주는 일 뿐입니다. 사랑에는 분명 십자가가 감춰져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흘려야 할 눈물도, 희생도, 배려가 함께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랑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주님이 하셨던 말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처럼 그분의 십자가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말하는 성전인 우리가 1독서에서 말하는 "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과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하신 오늘의 복음 말씀이 하나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끊임이 없어야 합니다. 비록 넘어지고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십자가의 사랑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작은 배려로 시작하는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는 실천은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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