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주님 부활 제 2 주일
가난한 이들의 친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부활 주일 다음 날(4월 21일) 하느님께로 돌아가셨다. 가난과 검소함으로 사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자 지구의 평화를 위해 그곳 본당신부에게 전화 하시고 격려 하시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셨던 그분, 부활 주일 미사에 깜짝 방문해 모든 이에게 강복을 주신 그 분은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 마지막 유언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보상을 바라셨던 그분의 사랑과 겸손이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주간 첫날, 새로운 창조의 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 유대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과 마음을 닫아걸었다. 죽음의 세력을 꺾어 버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 지내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라고 말씀하신다. 무서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새로운 희망이다. 사실 인생살이에서 아무런 다툼도 없고 갈등도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믿음이 살아나고 사랑이 움터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모두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남음도 모자람도 없는 대동(大同)의 사회가 아니겠는가? 대동 사회는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 서로 사람 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다.
세상은 평화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평화를 얘기하면서도 무기를 만들고, 평화를 운운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내리누른다. 개인으로는 나만 평화로우면 된다는 왜곡된 평화를 살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화는 그 의미와는 다르게 심각하게 훼손되어 힘의 균형이 깨지면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평화다. 핵무기를 만들고 상대방을 단숨에 무너뜨릴 정도로 절대적 힘의 우위에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는 우리 시대의 평화 논리는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거짓되고 허황한 주장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평화를 주신 그분은 곧바로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19)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숨을 불어넣으시며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신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권한을 주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관계회복은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하느님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오늘 복음에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믿음이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와 쌍둥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대변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표를 보여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을 믿기 전에 구체적인 증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이들의 바람이다. 그래서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아무리 쉬운 설명을 한다 한들 부활에 대한 이론은 머리로 납득되지 않는다. 해서 많은 이들이 부활에 대해 오늘 사도 토마스처럼 의심과 회의를 가질 수 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의심 많은 토마스는 증거 없이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제자들의 말만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 드리려 하지 않았을 뿐이고, 구체적인 증거, 예수님의 상처들을 보고 손으로 만져 보기를 원했다. 사실 아무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기라고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음을 볼 때 토마스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떳떳한 요구였을 수도 있다. 사실 의심은 또 다른 의미에서 관심이다. 관심이 없다면 의심할 필요도 없다. 사실 토마스의 마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너무 믿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믿게 해달라는 희망찬 외침이었다. 그러기에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 후 온 마음을 다해 열정적으로 고백할 수 있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보고서야 믿는 믿음 탓할 수 없다. 하지만 보지 않고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낼 수 없으면 이것은 탓해야 하고 지탄 받아야 할 신앙이다.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토마스의 실수는 보고 믿고 싶은 믿음이 약한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지만, 반대로 토마스의 고백은 우리 신앙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