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은 그의 책을 통하여 저에게 다음과같이 살아보라고 권합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무더운 여름을 지내느라면 살을 에이는 추위에 살아가노라면 짜증도 나고 움츠러들기도 합니다. 자연에 얹혀서 사는 우리가 그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당연한 일에도 순응하지 못하고 반발하게됨은 보통사람들이 갖는 본능이고 또 그 한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환경때문에 움츠러들고 왕짜증이 나게될 때에는 특히 그것이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게될 때에는 마냥 초연한체 물같이 바람같이 지내기란 여간 성숙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일입니다.
세상살이란 그런것이려니 치더라도 그리스도신앙공동체안에서의 삶의 경우일 때에는 모든 가치의 척도도 판단의 기준도 바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그 근거를 두어야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만이 진리이지 그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의 주장은 아집이고 교만이기 때문입니다.사람의 이해 또는 득실이 그 기준에 영향을 받지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명예가 하느님의 정의의 기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거기에 두어야할 것입니다.
지나고보니 잘못되었으면 될수록 얼른 바로 잡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사람이지 하느님인가?”
사람끼리는 그렇게 둘러대고 넘어갈 수 있을지라도 하느님앞에서는 억지일 것입니다.
살다가 보면 나와 의견이 맞지않는 이와 마주칠 수있고 그것으로 인해 다툴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진리에 마추어서 공동선을 찾아내고 화해의 손을 잡아야만 합니다.
먼저 손을 내밀면 이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고보면 “네가 먼저 내 따귀를 쳤지?”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지금 쓰고있는 사람의 논리가 아니라 예수께서 공생활 내내 가르치셨음을 성경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이면 늘 주님의 기도 그리고 평화의 기도를 바치지 않습니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하여 주소서.”
그러나 실은 이렇게 실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열 번이면 아홉 번은 주님앞에 어깃짱을 놓고 그 반대로 걸어가는 제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좁고 십자가의 가시밭이라 하겠지요.
그렇더라도 그 길로 향하여 가야만 할 것입니다.
빛이 거기 있고 그 빛에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