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ria Larsson )
지금부터 한 백 년전 쯤에
마리아는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나이가 찬 처녀가 되었을 때 한 청년을 만나 혼인을 한다는 것이 하필이면
그야말로 임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다만 한가지만 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술주정뱅이, 못말리는 주정뱅이였다.
언제나 어디서나 한가지 불가사의가 있는데 모두 똑 같은 불가사의 이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어도 밖에 나깠다 들어오면 코가 삐둘어지게 퍼 마시고
집에 들어서면서 하는 한 마디, “끄 윽 !” 트림이었다.
마리아는 혼인을 물리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궁리하고 자봉틀을 월부로 사다가 동네에서 옷수선 일감을
얻어다 끼니로 밥상위에 빵 조각과 미음국을 올려놀 수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운데서도 술주정뱅이 남편과의 사이에 7 남매를 낳아 키우고
식구들의 옷을 모두 손수 만들어 입히는 여인이었다.
무엇을 위하여 그 여인은 그렇게 살기로 하였을까?
무슨 힘이 마리아를 그렇게 살도록 도왔을까?
( 희망 )
그것이었다.
언젠가는 남편도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일감을 얻으러 가다가 거리의 진열장에서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보고 호기심이 생긴
마리아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어가 주인에게 자세히 캐묻고
그게 그 당시 처음 나온 카메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에게 당돌하게 그 기계를 월부로 갚을테니 외상으로 달라고 하였다.
마리아의 진지한 호기심에 주인은 외상뿐이 아니라 찍는 방법, 인화기술까지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남편은 이런 가난에 카메라가 뭔 당치않은 물건이냐며 부시려고 들었으나 마리아의
완강한 저항에 물러섰다.
마리아는 틈틈이 사진을 찍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당시의 그 신기한 일은 입으로
전해져서 소문이 나고 지역 신문에 기사와 함께 사진이 실리는 데 까지 발전하였다.
재료를 사고 기술을 배우러 드나드는 재료상 주인의 친절을 의심하고 의처증까지 생긴 남편은 부인을 살해하려다가 붙잡혀서 형무소에 장기복역수가 되었다.
다 성장한 아이들은 아빠가 없는 가정에 예상 못했던 평화가 찾아온 것을 느끼고
그동안 마음 고생이 오죽했으면 아빠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지만 엄마의 진노만 사고 말았다.
마리아는 언젠가는 남편이 새사람이 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지성이면 하늘마저 감동하는 걸까?
출옥한 남편은 과연 새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직접 방을 고쳐 아내에게 사진관을 꾸며주고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희망)
그것은 모든 것이 되는 원동력이었다.
사랑, 변화, 발전, 어쩌면 생명, 그 자체였다.
( 나귀 )
별 볼일도 없어 보이는 보잘 것 없는 한 나귀는 베다니아의 한 고을 모퉁이에
주인이 묶어논 채로 그러고 서 있었다.
누구도 그 나귀가 생명의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게 될 것이라고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쩌면 그 나귀 자신은 언젠가는 보잘 것 없는 자신도 값진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을까?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귀에게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가 찾아왔다.
” 함께 가자 ! ” 고 하였다.
” 어디로 가는데요 ? ” 나귀의 주인이 물었다.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
이렇게 해서 그 나귀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리스도를 등에 태우게 되었었다.
그렇게 한 낱 미물인 나귀도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데
하물며 (사람) 이랴 !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무 의미없이 우연히 생명을 얻어 태어나개 된 사람은 결코 없다.
어떻게 나귀와 견줄 수 있고 나귀보다 못하게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건가 ?
그렇게도 귀한 사람의 생명들이 아무 값어치 없는듯이 , 나귀 보다도 못한 생명처럼
취급되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전쟁을 통해서
사형 집행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무지막지한 어른들, 엄마와 또 그 가족들과 낙태의사들의 손에 의해서
그 수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게 많은 인간 생명들이 어제도 또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훼손당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직접도 알고, 들어서 알고, 뉴스를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도 ” 그렇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
” 나만 안그러면 됐지 남들이 하는 일을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
” 나는 식구들 하고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바뻐 죽겠는데 내가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왈가 왈부해야 되는 건데? 구찮아..”
언젠가 나의 주인께서 나에게 물었을 때 이렇게만 대답하고 말면 그만인 걸까 ?
의로운 체 하려는 게 아니다.
잘난체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의롭지 못한 죄 투성이 이기에, 잘나지도 못한 부끄러운 자이기에
조금이라도 그에서 벗어나 보았으면 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나귀처럼 생명의 창조주를 실을 수는 없더라도 창조주에 의한 피조물, 인간 생명
을 기도를 통해서, 평화적인 저항, 몸부림을 통해서, 무엇을 통해서라도 그 방패막이가 되어볼 수는 없는 걸까 그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함께 걸어 갈 이웃은 어디서 만날까?
나귀가 되고싶다
고개마루턱 까지 오고서도
주인이 가자 하는데도
네 발을 땅에 묻고 버튕기던
그 나귀 말고
볓은 서산을 넘어 가고
갈 길은 아직도 한참이건만
꾸엑! 우엑! 화를 뿜어 토해내던
그 나귀 말고
베다니아 들판에서
부르시는 소리에 귀를 열고
주께서 쓰시겠다는 소리에 마음 열어
” 예!” 하고 따라 나서던
그 나귀가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