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서 발끝으로
김 수환추기경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 중에 "이 세상에서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다. 그러나 제일 긴 여행은 가슴에서 발끝까지의 여행이다."라고 하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것을 가슴에 내려오는 것도 쉽지 않지만, 생각을 실천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머리로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가슴부터 발끝까지의 여행이 길어서일까요?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교회는 예수 성탄 대축일부터 40일째 되는 2월 2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성모 마리아가 모세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일찍부터 이 축일을 지내왔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4세기 말부터 이 축일을 기념했고, 5세기 중엽에는 촛불 행렬을 시작했습니다. 6세기에는 이웃 동방교회에 전파 되었고, 이 무렵에는 아기 예수를 바치기에 앞서 시므온 예언자가 고대하던 메시아를 성전에서 만난 것에 초점을 맞춰 '만남의 축제'로 지냈습니다. 이 전통은 7세기 후반 로마 교회에 들어왔고, 이후 다른 서방교회에 전파됩니다. 처음에는 동방교회처럼 '만남의 축제일' 또는 '성 시므온의 날'로 지냈으나 성모 신심과 성모 축일이 발달함에 따라 1969년까지 '성모 취결례(取潔禮)'로 지냈습니다. 오랫동안 주님 축일을 성모 축일로 바꿔 지내온 것입니다. 중세 후반에는 촛불을 들고 행렬하는 것 때문에 '성촉절(聖燭節)'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축일의 본뜻을 되찾아 1970년부터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힙니다. 교회는 일찍부터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전례 표지로 초를 사용해왔습니다. 이날 교회에서 초를 봉헌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돼 나 자신을 봉헌하자는 뜻에서입니다. 완전한 봉헌은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날 행렬에 사용되는 초를 축복하던 전통은 한 해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는 관습으로 정착됐습니다
그래서 이날 성전과 각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축복합니다. 사실 본당에서 사용할 초를 신자들이 봉헌하고 그것을 축성하여 교회에서 쓰는 것이 유래였지만, 나쁘다 할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신자들이 가정에서 쓸 초를 축성 받는 것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교회가 초를 축성하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였습니다. 전기가 없었던 시대에 초는 매우 중요한 물품이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에 주님 봉헌 축일을 '봉헌생활의 날'로 제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는 봉헌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특별히 수도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봉헌생활을 올바로 이해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기실 오늘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 된 날에 많은 수도자들이 종신서원을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의미에 중점을 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날 수도자들도 교회에 봉헌하려는 의미 일 것입니다. 사실 수도생활의 시작은 은둔생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수도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규칙을 쓰게 됨으로 거기에 따는 수도회들이 생기기 시작 합니다. 처음에 생긴 수도회들은 대부분이 봉쇄수도회였지만 세상의 요구에 따라 많은 활동수도회가 생기게 됩니다.
사실 수도회들은 초대교회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2,44) 이처럼 수도 생활의 꽃은 공동체 생활입니다. 저도 수도자 이고, 지금은 Fr. Don과 함께 살고 있지만 공동체 생활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전에는 가까운 곳에 수도원이 있어 자주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먼 곳에 있어 가끔씩 찾아가 공동 생활을 합니다.
비단 수도공동체 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아름다워지려면 오늘 초의 의미를 잘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비단 수도자, 성직자의 몫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불림 받은 것을 기억하며 우리 스스로도 봉헌되었음을 기억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좋은 생각이 발끝으로 전해 행동으로 나타내는 공동체였으면 합니다.
김두진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