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릴래아 )
나의 죄로 인하여 나의 주님은 내가 높히 들어 올려 온몸에 못을 박고 가시관을 씨워 조롱을 하고 당신의 엽구리를 창으로 찔러 죽으신 것을 재확인까지 하며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드렸는데도 저승의 끝자락까지 내려가셨다가 그래도 나같은 죄인을 흔들어 잠에서 깨우시고 살려내시고자 죽음을 이기시고 어둠을 물리시고 나의 곁으로 다시
찾아 오셨다.
내 아무리 악하다 한들 나 어찌 이렇게 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이를 내칠 수 있을까.
내 아무리 차갑다 한들 나 어찌 그렇게 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이를 모른다 할 수 있을까.
부끄러워 고개를 떨군 나에게 그분은 ” 이제 너는 갈릴래아로 가거라. ” 이르신다.
죄송스러워 차마 목을 세우지 못하는 나에게 그분은 ” 내가 너보다 먼저 그곳에 가 기다리겠노라. ” 하신다.
입조차 굳어 답 못하는 나에게 그분은 ” 나는 거기에서 너를 만나주리라. ” 하신다.
갈릴래아.
시골 나자렛이 있는 갈릴래아라면 예수께서 이세상에서 고향으로 삼으셨던 곳이 아닌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그래서 늘 부자와 세도가들에게 업수임을 당하고 짓눌림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
종일 뙤약볓에 그을리며 농삿일을 해도 간신히 먹을거리를 얻는 그렇게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갈릴래아에는
어째서 주님은 나더러 ” 그곳으로 가거라. ” 하실까?
부활의 신비를 눈으로만 목격한 나에게 주님은 그곳에 오면 가슴으로도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아마도 또
그에 더하여 새로운 계약마저 마련해 주시려는 것이겠지.
그들 곁으로 다가 가 벗이 되고 아픔을 함께 나누고 손을 내밀어 어려움을 덜어주며 그렇게 ” 서로 사랑하여라. ”
는 새로운 계약의 실행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간접적인 길임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이겠지.
그러면
그동안에는 갈릴래아로 갈 수 없도록 나를 봍잡아 매어놓아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내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들,
교만, 나태, 위선 허영심, 망설임… 그런 수많은 거추장스런 쓰레기의 무더기였을 것이다.
쓰레기가 아까워 미련이 있어 벗어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어리석음이라 쉽게 말하지만 그것을 벗어버릴 용기가 지금도 나에게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나는 또 내년 이맘 때를 맞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 때 또다시 이말을 똑같이 앵무새가 되어 년중행사처럼
읍조리고 있을 계획이라도 세워 놀 작정일까?
어느 시간표가 그때까지 기다려 앵무새가 되도록 기다려줄 약속을 해준다 할 것인가?
부활미사 때,
나는 사제가 ( )을 끊어버립니까? 물을 때 분명히 ” 네 ! ” 하며 대답 하나만은 아주 세련되게 했었는데…
‘ But are you so sure you’re going to do those? ‘
” …… “
‘ Why can;t you say anything, YES or NO ? Answer me please ! “
( 강정마을 )
제주도의 한 마을, 강정마을은 지금 한창 시끄러운 소리로 요란한 모양이다.
건설장비들 돌아가는 소리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사람들의 소리가 더 요란한 것 같다.
‘ 해군기지는 국가안보때문에 꼭 만들어야 한다. ‘
‘ 아니다. 그건 막아야만 한다. 자연을 파괴하고 기지는 오끼나와처럼 미국의 이용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대체적으로 이런 상반된 두 다른 의견이 마주치는 소리때문에 요란할 것이다.
이곳에서 그 멀리 떨어진 것의 진상을 소상히야 알 수 있겠는가마는 이것은 참 묘한 딜레마처럼 다가온다.
왜냐하면 양측의 주장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다 고려할만한 일리가 있어보여서 그렇다.
지금 그곳에는 반대하고 있는 마을주민들을 지원 옹호하려고 가톨릭 사제,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이 합류하고
있다고 보도는 전하고 있다.
힘있는 공권력에 몰리는 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고장을 지키려는 노력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을 것이다.
(갈릴래아) 로 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뜻이 거기에 있다고 전제할 때 그일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런데
한편 또 그대로 지나쳐버릴 수도 없어보이는 목소리를 그냥 묵살하기만 하는 일도 타당할까 하는 자문이 뒤 따르게 되는 것도 귀담아 들어보야야 하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은 어떤가?
엄연한 우리 섬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자가 바로 곁에 있고 남단의 또 다른 작은 섬을
자기네 구역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또 다른 쪽에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힘이 없고 우매해서 일본에게 점령을 당하여 나라와 말까지 빼앗기고 살아야 했던 암울했던 선조들의
뼈저린 체험이 바로 얼마전에 있었다.
그렇다고 ‘ 이에는 이 ‘로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야 하는가 하는 모순이 가로막는다.
이처럼 이세상의 일은 모순이 모순으로 대치하는 혼돈속에 우리를 당혹케 하는 일을 일상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무엇이 최선인가?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나? 무조건 막아야 하나?
로마병정의 귀를 자른 베드로의 칼도, 모른체 마을사람들의 사연을 외면하는 비겁함도 모두 능사는 이닐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양비론, 양시론에 스스로 휘말리는 자가당착이 된다.
지혜를 구해야 한다.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
(지혜를 청하는 기도, 지혜서 9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옳은 답은 반드시 주님안에서 찾을 수있을 것이다.
‘ 찾아라. 그러면 구하리라. ‘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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