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문학시간에 선생님은 졸며 앉아있는 나의 이름을 불러 세우고는 물으셨다.
” 야, 이녀석아. 엇저녁엔 뭘하고 교실에 와서 조느냐? 졸고있는 너는 시란 도대체 뭣이라고 생각하느냐 ? “
난 당황스러워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 아니 이 무더위에 콩나물시루 같이 끼어 앉은 교실에서 졸지않을 재주 가진 사람도 있을라구 ?
그리구 홍두깨처럼 시에 대해서 물으시면 나더러 어쩌라구..?
그래도 재촉하시는 선생님에게 무어라도 대답은 해야 했다.
” 저 선생님 잘은 모르겠지만 시는 아무래도 시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댔다.
무더운 교실에서 나처럼 졸지만 않았지 반쯤 잠에 떨어지고 있었던 아이들이 이제 잠에서 깨어날 꺼리를 만난 셈이였다.
그런데 뜻밖에 일이 벌어졌다.
까르르 대는 아이들을 제지하시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얘들아. 웃을 일이 아니다. 저녀석이 졸긴 했지만 말은 맞는 말이다. 무릇 시(詩)란 시시(詩詩) 스러워야 하는 법이야. “
난 점점 더 오리무중 상태가 되고 정신이 없었다.
‘ 아니 정말 시는 시시해여 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 ‘
나는 시시(Dull)하다 는 뜻이었는데 선생님은 시적(詩的, Poetic)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멋있게 해석해 주셨던 거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던지 나는 자라면서 드문드문 시에대해서 조금 흥미를 갖게되기도 하였지만 흥미와는 달리 시는 점점 두렵고
두터운 가로 막는 벽처럼 느껴졌다.
나같은 둔재에게는 근접도 하여서는 안되는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다가 어떤 시인이 무턱대고 마구 써대는 함부로 시라고 써대는 이들을 나무라는 글을 본 이후로는 무서워지기 까지 하였다.
그렇다고 시인들이 써 놓은 아름다운 시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이야 어떠랴 싶어 더러 시집을 뒤적이기도 하고 나보다도 더
무식한 학교때 짝쿵들을 만나면 좋아하는 시 한 수를 읊어주며 ” 어떠냐? 임마. 멋있지? “
그러면 그 아이들이 대답했다.
” 너 요즘 어디 아픈데가 있냐? 요새 너 우릴 웃기려고 무척 애를 쓰니 말이아. 왜 그러는건데 ? ”
그 아이들의 반응으로 봐서 아마도 난 남의 시일 망정 읊조리는 것도 조심해야 할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가끔가다가는 오늘같이 비라도 오려고 꾸물거리는 날에는 괜시리 만용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 만용의 한가지를 부끄럼도 모른채 여기 펴 놓는다.
( 아해야 , 왜 우느냐 ! )
창자가 고파지면 아해는
왜 우는가
주린 창자 채우라고 보채는 울림일테지
아이의 창자가 비워지면 엄마는
또 왜 우는가
채워 줄 젖 안나오니 서러워 울 터이지
아내가 고달프면 서방은
왜 또 우는가
몸 져 누어 벌이 못해 맘 아파 우는게지
아해야
우지말고 엄마 아빠 설케마라
동녘이 밝아오면 좋은 기별 또한 따르려니
( 겉모습을 꾸미자 )
집회서는 (나)에게 조심할 일을 당부하고있다.
‘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겉모습을 보고 그를 혐오하지 마라. ‘ (집회서 11.2)
예수님도 허망한 우상같은 겉모습을 좆는 (나)를 경고하신다.
”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 (마태11.7)
그런데 나는 오늘 나자신에게 겉모습을 꾸여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싶다.
사람의 겉모습에 대해서 많은 경우 삶속에서 그 개념을 혼돈하고 잘못 이해되는 경우들을 보게된다
이 혼란해진 개념은 많은 이들을 잘못된 길로 안내하기도 할 것이다.
그저 세상적인 관념으로 미남, 미녀. 잘생긴 멀굴, 아름다운 얼굴. 속된 표현을 빌면 쭉쭉빵빵.
그런 것들에 모든 가치관의 최상으로 삼아 젊은이들은 성형과 의사들과 수술예약에 정신을 쏟는다.
남의; 얼굴을 빌리는 것이다.
나의 고향에는 봉산탈춤이라는 놀이가 있다. 그것은 탈을 쓰고 춤놀이 하는 이의 삶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얼굴 겉에 쓴 그 탈의 임자의 삶을 풀이하는 것이다.
성형과에 찾아가 남의 얼굴로 바꾸어 놓은 그 사람은 누구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일까 ?
젊은이들 뿐일까? 어른들도 얼굴에 잡힌 주름을 없애려 화장품 가게로 미용실로 돈을 싸들고 찾아다니다고 한다.
물론 젊어지고픈 그 마음, 예뻐지고 싶은 그 마음, 이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이세상에 젊어지고 아름다워진다는데 싫어할 이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할 일이있다.
만일 90 노인이 화장품의 도움으로 아니면 의사의 도움으로 얼굴에 주름들을 20 대 청춘처럼 빤질빤질하게 펴서 거리를 활보
한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아름다운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얼굴의 주름도 몸의 노쇠화도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하나의 기록이며 증거물이다.
자연의 흐름을, 변화를 인위적으로 거스르는 일은 어쩌면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행위도 반크리스챤적일지도 모른다.
창조주께서 예비해 놓으신 길을 거슬러 되돌아가려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그럴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참 아름다운 겉모습을 꾸미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된다.
정말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겉무습 꾸미는 삶이 있다고 믿는다.
수도자들, 또는 오랜 세월, 그의 삶속에서 수도자처럼 살아온 이들의 겉모습을 보느라면 참으로 아름다움을 본다.
그것은 잘생겼다, 미남이다, 미녀다 하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겉모습이다.
어째서 그들에게서 (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겉모습을 보는가?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본다.
그이들의 아름다움 겉모습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룩해 낸 것이 아닐 것이다
Because it won’t be happenning over night at all.
오랜 삶안에서 선한 마음을 품고 그 선한 마음을 이웃에게 실행하며 나를 내신 기분께 온전히 나를 의탁하며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
삶을 꾸며 왔기에 그 행적이 그의 겉모습으로 변화되어 드러나게 됐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가르침을 살아온 이의 겉모습일 것이다.
그러고나니 새삼 나자신의 모습이 살펴진다.
(나)는 그동안 그 아름다운 수도자의 삶과 동떨어지게 살아왔으니 그러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은가?
이제 세월은 다 흐르고 난 이제와서 어떻게 어느세월에 그 수도자의 삶을 훙내라도 낸단 말인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면서 이제 어쩌나?
내가 그 시간이 되어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는 ” 나는 도무지 네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하실 게 아닌가?
그래도 길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곧 시작할 때이기 때문이다.
반나절이 남았건 하루가 남았 건 시작이 절반이다. 시작이 중요할 것이다.
시작하여 실행하는 그 절박한 정성을 머리카락 마저 세시는 주님께서는 다 기록해 놓으실 것이다.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이제라도 이글을 쓰는 것 여기서 줄이고 (나)는 시작해야 할까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