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과 겨울나기

 

 

 

 

 

김장과 겨울나기

 

 

날씨가 쓸쓸히 추워지기 시작하는 이 때쯤이면 생각나는 풍경 하나가 있습니다. 같은 동네의 아낙네들이 모여 왁자지껄 웃으며 김장을 담그는 일입니다. 배춧잎을 숭숭 썰어 동탯국을 끓여 먹어 가며 "올 배추는 참 실하네, 무가 참 다네" 하며 김치를 담가 김칫독에 꼭꼭 채우던 동네 아주머니들의 벅적거림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김장을 담그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맛있는 김치 하나면 겨울을 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저의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이제 김장도 끝냈으니,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끄떡없겠네."시던 호기어린 말씀도 기억이 납니다. 김장이 긴 겨울의 반찬을 준비를 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오늘의 말씀은 연중시기의 마지막 즈음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바리사이들과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전에 마르코는 예루살렘에서의 논쟁과 대담 (마르코 11,27-12,37)을 소개한 다음 그 결론의 말씀으로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훈시와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시는 상황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율법학자들은 거짓 신앙의 표본이 되고 가난한 과부는 참 신앙인의 귀감이 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누구나 축일에 두루마리 비슷한 것을 예복으로 입었습니다. 그런데 율사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예복은 한결 길었답니다. 또한 남자들은 성구갑(트필린)을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고 다녔다고 합니다. 성구갑에는 신명기 말씀 6, 4-9의 말씀 즉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중략>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 라는 글을 담고 다녔는데 그 말씀에 따라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에 붙이고 다녔으며 집 앞 문설주에도 메주자라고 하는 성구갑을  달아 놓았답니다. 그리고 겉옷 자락 네 곳에 흰 실과 푸른 실로 꼬아 만든 옷단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남들 보다 성구갑도 큼직하게 달고 옷단 술도 기다랗게 만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율사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선생님 혹은 아버지(압바, 압히)라 부르며 인사를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가르치고, 율사가 잔칫집에 오면  집 주인은 영광스럽게 여겨 늘 윗자리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마치 본당신부의 모습 같아 섬칫해 집니다. 늘 로만칼러를 입고(남과 다른 복장을 하고) 신부님하며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잔칫집에 가면 늘 윗자리에 앉게 되는 신부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로만칼라도 안하고 잔치집에도 가지 않으며 욕을 얻어먹지 않으려고 문을 닫아걸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단 공치사나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쓴다면 능률적인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좋은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아들어야 한 것은 가난한 과부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물정을 잘 몰라 돈의 가치를 환산하지 못해서 생긴 해프닝이 아니라 오히려 돈의 가치를 너무 정확하게 환산한 예수님의 계산법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모이는 "여자들의 구역"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에는 헌금함 열세 개가 있었습니다. 과부가 넣은 렙톤 두 닢은 우리가 사용하는 동전인 쿼러(Quarter) 정도 되는 돈입니다. 한 데라리온이 하루의 품삯이었고 한 랩톤은 128분의 1 데나리온이었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돈은 그 액수가 아니라 관대함 마음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가 하는 문제는 돈의 액수를 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는가는 시간의 많고 적음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평일 미사 때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이더 좋을까 아니면 베품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을까? 그럼 베풀려고 할 때 얼마를 가지고 있어야 베풀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제 1독서의 열왕기 말씀, 굶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과 먹으려고 남겨 두었던 밀가루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의 처분만 바라자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겁니다. 올바른 마음으로 신앙의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과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색 낼 사람도 없어, 관대해지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밀가루 한줌으로 빵을 구워 먹었다면 과부는 어린 아들과 결국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관대했던 가난한 과부의 밀가루 단지는 비워지지 않았고 기름병도 마르지 않았다고 제 1독서는 전합니다. 우리의 계산법과 하느님의 계산법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우리가 행하는 신앙의 행위는 바로 이런 관대한 정신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참 행복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멋있게 보이는 것이 구원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관대함을 배우고 기쁨을 살아가는 것은 구원을 살아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김장을 충분히 담갔다고 겨울을 편히 지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과 명예를 받았다고 하늘나라에서의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배운 관대함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실천하는 겸손함이 우리 삶의 참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 시민의 자격을 갖춘 이들이라 할 것입니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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