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

장례미사를 다녀 오면서
내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생각을 하였다.

전에도  미사에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불렀던 교우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간 이가
동년배였던 탓일까 많은 생각 속으로 이끌어 주었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죽음은 두 가지의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이 아닐까?

육신도 또 그 육을 떠난 영혼마저도 부활의 희망을 갖을 수 없는 완전히 사망선고를 받게될 죽음이 있을 것이다.

이딸리아가 나은 불멸의 시인 단테의 신곡을 보면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많은 영혼들이 악령 루시퍼의 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저주받고 또 서로를 저주하는 형벌
을 받으며 그야말로 자신이 죽고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절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의 다른 모습은 이 땅에서 몸 담고 실았던 육신을 벗고 떠났으되 대부분의 영혼이 완전한 영으로 정화되기까지 지극히 고통스럽기는 하나 그 영혼이 받아야 할 값에 따라 그러나 한시적으로 값을 치르고는 이미 기쁨과 자유와 희망을 누리며 있을  하느님 나라의 다른 영혼들과 합류하게 될 육신의 죽음이 있지 않을까?          

( 삶과 죽음 )

세례성사를 통하여 부활의 희망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나도 여느 교우들처럼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다.
즉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였으며 미사때에도 기도시간에도 예수님을
‘ 나의 주님’이라고 시인한다.

그런 나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나는 그 때가 되어 나의 육신과 작별하여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과연 영원한 형벌이 기다릴 그 세계를 자동적으로 면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걸까?

아니면 정화소의 호된 씻음의 값을 치르면 구원의 길을 간다고 장담이 되는걸까?

나의 희망사항이 그렇다고하여 그것이 내 영혼을 보장해 주는걸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더 하고 희망을 간직한다 하여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가르침)

내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려는 그 근거를 하느님의 가르침 안에서 헤아려본다.

토마스 멀튼에 의하면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입으로 시인한 (믿음)은 일치가 되기위한 그 시작이며
또 믿음은 그냥 받들어 모시는 신봉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여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시인했던 예수님과의 일치 즉 (하나)가 되려는 시작일 뿐이며 그러나 아직 그것만으로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 것은 아니다.

나의 일상의 삶을 퉁하여 또 그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뜻안에 있지 않으면  내 입술로 말하는 믿음 말고는 나는 하느님과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것이 된다.

나를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예수님은 아버지께 그것을 직접 열망하고 계시지 않은가?

”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믿는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17,22)  ” ut sint consummati unum. “

그것은 필수이다.
왜냐하면 나와 주님의 관계는  하나의 몸과 지체여야 하며 포도나무와 그 가지여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박해하였던 사울이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그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나는 지금 사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바울로 변모하였는가?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어린 아기들을 모두 죽이기로 하였던 헤로데.
그 아기는 바로 생명이시며 부활이신 구세주이시고 죽이려 했던 그는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져 간 사건은 다만 하나의 아이로니 였을까?

(지향해야 할 삶, 그리고 맞아야 할 죽음)

* 자유인이 되자.
매일의 삶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기쁨과 슬픔, 물질의 풍족이나 부족,
이런 것들에 사로잡혀 그 노예가 되지말고 자유함을 얻자.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고 한 바울의 말씀을 늘 가슴에 담자.

* 그러기 위하여서 넓고 편한 문이 아닌 좁은 문을 기쁘게 맞으며 늘 깨어서(마르13,32)
  주님이 주신 명령인 새로운 계명(마태22,34)을 실행하자.

* 새로워 지자.
   (새로워진다)는 말의 참 뜻은 본래 또는 어제는 있지도 않았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초심으로 되돌아 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었던 처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

(너무나 큰 숙제)

위와 같은 지향을 실천하며 살게된다면
멀튼의 말 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에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며 정말 내가 만약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개념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나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죽임으로서(沒我) 영생의 구원을 추구하는 삶이 되겠지만 실행은 아마도 그 무게에 짓눌리는 십자가의 고행일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은 무엇이 됐건 간에 매 순간마다 자기의 영혼에 무엇인가를 심고 있다고 한다.
오늘, 지금 내가 어떤 씨앗을 심으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따라 훗날에 그 열매가 심은대로 나타날 것이다.
콩 심은데서 콩이 나오는 원리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재판관은 내가 어떤 씨앗을 심었고 그래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를 하나도 숨김없이 꺼내 보여 주실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용이 그때 나의 육신을 떠난 나의 영혼이 갈 곳을 정해준다고 보았을 때 (죽음)과 (삶)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져 보인다.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일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며 죽고자 하면 살 것이란 말씀의 뜻을 곰곰이 새겨 보게된다.  

매일 한 번씩 나를 죽이며 살면 죽을 때에 나는 영원한 삶을 얻들 수 있을지 모른다.

한꺼번에 큰 씨앗이  무겁고 너무 커 보인다면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한다면 덜 어려울까?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하니.   

그런데 막상 나의 문제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지향하고자 하는 삶에서 너무나 까마득히 먼 곳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나태하여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아직도 머뭇거리면서 나의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실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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