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워진다는 것 )
지금 우리는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또 새로 나온 문명의 이기를 만나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고
그러고나면 곧 또 다음날 다른 것을 마주해야 할만큼 빠르고도 급변하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개인, 나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가늠하자면, 껌뻑 껌뻑거리다가 한참만에야 불을 켜서 제모습을 찾는 형광등처럼
만사를 익히는데 굼뜨고 더듬는 나같은 사람은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의 사용법은 제켜놓고라도 그물건이 무엇하는데 쓰이는 겐지
그것만 알아내는 일도 벅찬 과제일 것같다.
(스마트폰) 이라는 걸 손에 쥐어본 일도 없지만 나에게는 걸고싶을 때 누르고 울리면 받아 응답하는 단순한 (어글리폰)이 없어지지만
말고 곁에 있어준다면 하는 바램이다.
과학이 우리의 삶에 가져다 준 혜택이나 편리함을 깡그리 무시하려는 무모함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과연 과학의 발달로 얻게된 특징인 (편이)와 (신속함)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과 기쁨 그래서 행복을 안겨주고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까 ?
단추 하나만 눌러 밥을 짓고 압력밥솟은 더욱 빠르게 밥을 상에 올려주며 70 마일로 달려 간신히 출근시간을 맞추는 시대인데
어째서 우리는 아궁이에 매번 불을 짚혀 밥을 하고 종일 걷거나 콩나물 뻐스에 시달려 일터에 가던 때보다 더 바쁘고 더 쫒기며
그리고도 마음은 더 급하고 각박한가.
새로워진다 고 하는 것은
삶의 기본과 그 근본에 근거하지 않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없는 것들에 나를 내맡기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
풀과 여물을 먹던 소가 새로워진다고 설롱탕을 먹게되거나 하나뿐인 복음을 사람의 입맛에 맞추어 멋대로 해석하여 수천개의
사이비신앙을 만들어 우매한 백성들을 벼랑으로 안내한다면 그것은 발전이 아닌 멸망의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문명을 쫒는 습관때문인지 언제나 매우 마음이 급하고 서두르며 어제도 오늘도 늘 해오던 삶의
기본에도 곧잘 권태와 지루함을 느낀다.
어제는 몰랐고 어제는 본일이 없는 그 무엇을 추구하고 그것이 나타나면 신기해하며 그것을 쫒는다.
그러다보니 올바른 우상도 아닌 것같을 그냥 나같이 생긴 사람을 감람나무인줄 알고 속아 집을 팔아 돈을 싸들고 쫒아가는 소경이
되어 또 다른 소경을 쫒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하고 게으르고 나태하여 늘 그자리에 머물어서는 안되고 부단한 노력으로 삶을 질적으로 진화시키며
자족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기본과 근본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를 내신 창조주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라 생각된다.
가령 성경을 매일 다른 내용으로 조금씩 바꾸는 노력을 한다면 그것은 새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왜곡하여
우리를 벼랑으로 끌어가는 원동력이라해야 할 것이다.
( 정제된 식품 )
지금 어지러워진 세상탓인지,
많은 식당들이 손님의 입맛을 끌어 장사가 잘되도록 하려고 인공감미료를 쓰고 식당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시장에서 파는 물건이
어느것이 먹어서 해가 안되고 어느것이 자연 그대로 신선한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않게 눈속임이 공공연하다고 한다.
특히 가공된 정제식품은 그 포장에 쓰여져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혼동되는 서로 (불신)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같다.
그런데,
정제된 것이 어찌 비단 식품뿐이랴.
(정제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있을지.
사람을 어찌 정제되었다 말할 수있고 그런 엄청난 판단을 함부로할 수있을까?
잘못된 표현이고 비뚤어진 판단일 수있지만 그렇게 밖에 볼 수없는 현상들이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사람이 그 안에 갖고있는 정신이, 마음이 정제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창조된 모습이 아닌 변질된 모습으로
말하고 행하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엊그제도 콜로라도주에서 한 젊은 청년이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손상하는 괴이한 사건이 있었다.
그렇게 무자비한 짓을 저지르고도 법정에 끌려나온 그는 머리를 새로 염색하고 무표정한 채 앉았다.
마음이 정제되고 변질된 사람의 본보기였다.
자기가족은 먹지못하도록 만든 식품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고 큰돈을 버는 사장님 행세를 버젓이 하는 정제된 사업가.
단순히 돈을 번다는 욕심으로 찾아오는 임산부의 모태에서 숨을쉬며 살아있는 생명을 갈쿠리로 긁어내며 무표정할 수있는
정제된 면허를 받은 살인자들.
그뿐인가.
그 살인행위를 합법화하는데 앞장선 이나라의 현직대통령.
그 정제된 사람은 다시 한번 연임하도록 뽑아달라며 백성들앞에 미소를 짓는다.
그뿐인가.
자기의 독재행위에 반대하거나 방해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수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때리고 살해토록 지시한 정제된
독재자의 딸은 혈육이라고 무작정 감싸고 두둔하면서 그 대를 아버지에 이어 권력을 잡게하달라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사람들은 그이름을 환호하며 반기는 모습을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근무했던 직장관계로 우연히 보아서는 안될 몹쓸 기록들을 똑똑히 보았다.
백성들이 미처 모르는 수많은 못된짓을 저지른 기록들을 보았다.
그렇게도 많은 못된짓을 하고도 영웅으로 불려야한다면 그 사회는 많이 병든 사회라 불려도 괜찮을지.
사회의 지도자를 뽑아야 할 경우가 됐을 때.
하느님의 사람들이라면 설사 나에게 경제적으로 또는 다른 이익이 안되거나 손실을 보더라도 하느님의 정의를 바탕으로 판단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믿고 그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일이 곧 신앙생활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망각의 미덕)을 말한다.
그 미덕은 우리에게 좋게도 또 나쁘게도 작용할 것이다.
사람은 때로 잊어야할 것은 오래 간직하고 기억해야할 일은 쉽게 잊는다.
수십년전의 일도 기억하면서 오분전의 일은 잊는다.
(다마스커스의 소경)
사도 바울로.
우리가 배워서 알고있듯이 그는 한때 얼마나 심하게 열렬히 사람들을 쫒아가며 괴롭히고 또 핍박했었는가.
다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일이 죄라며 못살게 굴었던 그였다.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직접 기독교도들을 못살게 굴 목적으로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그를 붙들어 세우고 눈을 멀게하여 소경으로
만드셨을까?
그러나 그렇게해서 주님을 만난 그는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를 위헤 밤낮을 가리지 않은채 일하다가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기쁘게 바치는 순교자가 되었다.
똑같은 한사람이 육신은 전과 마찬가지인데 그안의 마음이, 영혼이 바뀌자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는 실제 현상을 우리는 그에게서 본다.
나는 우리 성당에 가려면 거의 한시간 가량을 소비하여야 한다.
그것때문에 나자신은 그런 인사받기를 원한바 없어도 교우들로부터 (먼곳에서) 온다는 위로의 인사를 받는다.
걸어서 오는 길도 아니고 자동차로 오는데도 말이다.
바울로는 걷고, 때로는 나귀를 얻어타고 배도 타고 그러면서 소아시아와, 중동지방과 유럽을 수차례를 거퍼 다니며 오직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였다.
그냥 다니기만 하였나.
잡혀서 옥에 갇히고, 잡혀 매를 맞고 손으로 맞고 돌로 맞고 몽둥이로 맞으며 다녔고 그러다가 그리스도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나는 생각한다.
교우들이 “먼데서 왔군요.” 말하면 나는 그말에 취하여 잘난채, 교만해지는 마음으로 변하지는 않을까?
그 알량한 길을 왔다고 으쓱대지는 않을까 ?
뭣으로 잘난척 할 수있을까?
복음을 전하러 왔나? 선포하러 왔나?
나자신을 위해서 오면서 무슨 위로를 받아야 할까?
나는 주님이 마련해 주신 눈의 시력을 나쁘게 만들어 안경을 낀다.
때론 안경으로도 잘 안보이는 것이 있고 불편할 때도 있다.
나는 육신의 눈만 잘못보는 게 아니고 영의 눈도 흐려지고 신앙적으로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몸은 나름대로 부지런히 성당을 드나들지만 마음은 세상에다 눈을 팔며 무엇을 부지런히 쫒고있는 것은 아닐까 ?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이름표를 달았을지라도 마음은 정제되고 세상에 아부하며 살고 있는 위선자는 아닐까 ?
오늘도 어제처럼 무덥지만 정제되었을지도 모를 재료로 밥을 한술 지어먹고 앉아 남들을 손가락질 하며 또한 부끄러울 나의 모습도
스스로 손가락질 해가며 잠시 돌아다 보는 시간을 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