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 God father )



 

 

( God father )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곁을 찾아 오신 날, 부활주일에, 

우리 교회는

열 여섯 분이나 되는 대부와 대모( God mother )를 만나시는 열 여섯 분이나 되는 새식구들을 맞게되었다.

 

주님의 부활사건과 더불어 겹경사를 만난 셈이다.

얼마나 기쁘고 감동스런 일인가.

 

함께

주님께 감사드리고 찬미하며 하느님께 영광드릴 일이다.

 

그렇게도 기쁘고 즐거운 날에,

우리는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며 그냥 기쁘다, 즐겁다 그렇게만 지나치지 말고

깊이 자못 심각한 마음으로 함께 더듬어 보아야만 할 일이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다 알고있는 바와 같이 

우리 신앙공동체가 탄생한 이래 지난 40 여년 동안에

해마다 두 차례에 걸쳐 많은 교우들이 애 써서 선교를 하신 덕으로 많은 새 가족을 맞이하여

그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 삶을 이어갈 수 있게하기 위하여

우리교회 고유의 교리를 가르쳐 깨우치게 하고 또 성경을 바탕으로 한 신앙교육으로 하느님을 만나도록

이끌어주신 덕에 우리교회가 영성적으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이가 애 써서 새가족을 맞고 키웠음에도 불고하고 

오늘날 우리는 또한 마치 자루에서 곡식이 한 알, 또 한 알 빠져나간듯이 

많은 세례교우들이 더 이상 우리가 미사 올리는 자리의 곁에서 만날 수 없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이 무슨 변고인가.

 

지금 여기서 그 누구에게도, 대부모님께도, 선교로 이끌어 오셨던 이들에게도, 그렇다고 우리 곁을 떠나 가신 그이들에게도

손가락짓을 하며 비난하려거나 비난하며 책임을 물으려 한다거나 

그런 몽매한 일을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만에 하나라도 누구도 누구에게 손가락으로 가르키려는 행위를 한다면 오히려 크게 더 그르치는 일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 나는 애 써서 나가 선교활동으로 새가족될 사람을 모셔왔으니 그 다음은 나의 소관이 아니오. “

한다던지, 

” 나는 그들에게 교리와 성경말씀을  가르쳐  세례교인이 되는 길로 이끌었을 뿐이요. “

아니면,

” 나는 그이의 대부(모)가 되어 그의 신앙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소. “

이런 일은 있지도 않을 것이지만 책임한계를 지으려 한다면 이런일도 걱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위의 역할중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하였으니 아무런 책임도 없을 것인가 ?

오히려 도의적으로 더욱 큰 수치심과 책임감을 통감하게 된다.

 이웃들이 많은 애를 쓸 때에 나는 뒷짐만 지었을 경우이니까.

  

다만

우리는 다 함께 이 심각한 일을, 그갓을 제목으로 삼아 탁상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맞대고 논하여야 한다고 믿어진다.

 

우선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

원인을 모르고서야 대책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낼 수 있다면 그 원인을 줄이거나 없이 해서 그위에 대책방안을 만들 수 있다고 믿어진다.

그렇게해서

방안이 선다면 실행하면 될 것이다.

 

그런 강구책을 만들고 선회하는 계기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칫

우리는 해마다 하나의 년례행사를 되풀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이런 제언을 하게 하였다.

 

오늘의 여러 새가족을 환영하면서 그 일이 우리공동체가 더욱 활기차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을 뿐이다.

 

 

 

( 기쁘게 산다는 것은 )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 하세. “

 

부활주일 미사에서 우리는 주님께 화답하는 노래를 그렇게 부르며 부활하신 하느님으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였다.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차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신앙인으로서 내가 기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

얼른 쉽게 그 답이 간단히 마음에 잡히지 않는다.

 

기쁘면 우선 사람은 웃게되는데…

그러면 아침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나오면서부터 이유야 있건 없건 

” 히죽히죽 ”  그렇게 그날의 삶을 시작하고 또 종일 그렇게 하라는 뜻일까.

도무지 그럴 일은 아니라 싶은데 ?

 

그럼 그냥 좋은일이 생길 때면 그래서 기뻐서 웃으라고 ?

살면서 나에게 좋은 일 생기면 기뻐하는 것이야 구태여 안배워도 다 할텐데…

 

안그러면,

기쁜일이 있어도 또 슬픈일이 일어나도 좌우간 웃고볼 일 ?

아닐 것 같다.

 

몸이 아파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어제 집안에 상을 당하였고 밤세 태풍이 몰아쳐 집안을 풍지박산 당했을 때

기뻐하라는 청은 온당치 않아보인다.

 

기뻐하라는 말은

그저 단지 ” ^ㅇ^, ㅎㅎㅎ, ㅋㅋ…”  그렇게 하는 것 그 너머에 그 숨은 뜻이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나의 삶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야 할 경우를 ,

성경은 

어떻게 말해주고 있을까 

그 답을 찾아 보물창고에 들어가 보아야겠다.

 

*   *

 

”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 (1베드로1:5)

 

이 얼마나 기뻐해야 할 확실한 이유 인가 ?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느님의 힘으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마지막 날에 날 구원해 주시고자 한다.

하느님께선 날 무엇을 보시고 ?

다만 나의   ( 믿음 )  을 보시리라 하신다.

 

믿음은 단지 입으로 시인하는데서 시직해야겠지만 삶 속에서 실행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과 다름 없을 것 이다.

( 믿음 ) 은 사도 바울님이 지적하셨듯이 ( 사랑 ) 안에 귀결 되어야할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그 무엇도 다 아무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명인 새계명을 실행하는 데서 찾아야 할 일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

 

”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 “: (야고보2:14)           

 

그려면서도 우리 사람은 시련을 만나고 고통을 당하면 하느님께 향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당장엔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것이 

육신을 갖고 세상안에서 살아가는 이의 한계이고 약점이기도 할 것이다.

 

” 여러분이 지금 얼마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 입니다.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단련으로 순수하게 되어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예를 차지할 것입니다, ” (1베드로1:6)

 

내가 만나게 되는 시련과 고통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베드로 성인은 설명해준다.

나는, 

시련을 피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하느님의 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순응하며 순명하는 자세로 

이겨낸다면 주님은 결코 나의 슬픔을 외면치 않을실 것이다.   

 

그래서

아마 다윗도  ” 해돋이에서 해넘어까지 야훼의 이름은 찬양받으소서 ” 기뻐 노래하였을 것이다.(시편113:3)

 

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게으르고 또 나태하다.

그래서 어쩌면 주님부활의 기쁜 아침에도 해가 하늘에 솟도록 기다려 그제서야 부시시 눈을 부비며 창밖을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게으른 자,

이 죄인에게 마저도 주님은 내치지 않으시고 손을 저으시며 죄인을 사랑한다 이르셨다.

”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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