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 못이루는 밤에 )
벽에 걸린 시계는 아침 3 시를 넘어가고 있는데, 눈은 충혈이 되어 벌겋고 다깝고 머리는 지근거리는데도 앉아있는 꼴이라니.
잠을 청하러 누었다 일어나 앉았다 그걸 거듭하자니 오히려 힘들어 앉아 있기로 한다.
멍청하니 앉아있느니 두런 두런 혼자 생각과 이야기나 나누는 게 낳으려니 싶어진다.
Insomnia, 불면증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니 몹쓸 나쁜 증세같다.
몸안에 어떤 병이 원인이 되는 수도 있고 자극성이 많은 음식물의 과다복용으로도 또 그밖에 걱정거리등 심리적 요인으로도
깊은 밤에 잠을 못이루는 나쁜증세에 시달리게 되지만 단기간 일시적으로 그렇다가 바로 잡혀야지 오래도록 습관으로 자리잡히면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지식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불면증으로 시달려본 이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생각들이, 고독감이, 삶속의 스트레스들이 나를 불면의 밤으로 계속 몰아넣고 있다면 그것들은 자칫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끌고가게 될지도 모른다.
나를 잠 못자며 새벽이 되도록 깨어있게 하는 원인이 나를 절망으로 몰아갈 수도 있을 그것들이라면 나의 내면의 그것들과 대면하여
풀 방도를 찾아야지 알코올, 약등의 매개체의 도움을 얻으려 시도한다면 일시적인 효과에도 불고하고 궁극적으로는 나를 더는
돌아킬 수없을 절망에로 끌어가게될 것이다.
일상의 스트레스, 신앙관 이나 나의 사상(생각)으로 인한 자신과 내면의 또 다른 나와의 대적이라면 고통스러우면서도 한편 나는
기뻐해야 할 자리에 도달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삶에서 그토록 나를 괴롭힐 만큼의 생각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절망)의 끝자락에서 드디어 (희망)으로
나아갈 빛앞에 와 있음을 뜻할 수 도있기 때문이다.
절망은 내가 희망에로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만나고 거쳐야할 갈랫길의 길목이다.
마더 데레사, 예수 아기의 데레사도 성녀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한때 하느님의 존재마저 의심되고 육신의 죽음뒤에 그 이후의
삶이 과연 이어지는 것일까 하는 명제와 씨름을 하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까지 경고한 키에르키고르(Kierkegeard) . 그래서 우리에게 그 절망을 만나거든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아라. ” 고 하면서 ” 그 하늘에는 구름이 있고 별이 있다. 그리고 그 넘어에 희망이 있다.
그러니 희망을 보아라.” 하였다.
나에게 있어 그 희망은 누구인가?
내가 만난 하느님.
나의 하느님은 나를 구원하실 주님이지만 그분께 도달하기 위해선 절망에 이르는 고통을 통하여야만 한다.
잠 못이루는 밤에서의 절망은 병일 수 있으되 악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삶속에서 절망을 만나거든 피할 일이 아니되 통하여 빛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두 갈래길에서 너르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좁고 괴로운 길을 통하여 나에게로 오라고 예수께서 이르셨다.
노벨상을 받도록 훌륭한 글을 썼던 헤밍위에, 일본의 기와바리 야스나리 는 그 절망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었다.
한편 톨스토이, 도스도엡스키 는 제정러시아의 압제에서 절망적 삶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글로 고발하고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하고야말 것이라고 격려와 용기를 복돋았다.
눈이 충혈되고 핏발이 서고도 잠 못이루며 지새는 이 밤에 나는 과연 (희망)에의 길을 찾았을까 ?
( 데레사 – 데레사 )
15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관구 주교님을 협박 ? 하다싶이 졸라 갈멜수녀원에 입회한게 된 소화 데레사.
몸이 허약하여 선교사의 길은 포기하고 언니들이 있는 특히나 엄격하고 세상과의 접촉이 제한된다는 수녀원에서 대신 선교사와 수도자들을 위한 기도를 가장 중요한 그러나 단순한 사명으로 삼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변에 하느님의 사랑의 향기를 전하였지만
너무나 젊고 짧은 이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하였다는 예수 아기의 데레사 수녀.
바로 그 소화 데레사의 거룩하고 단순한 영성을 본받으려 세례명을 택하였다는 마더 데레사.
그렇지만 마더 데레사도 몸이 허약하였음에도 소화 데레사와는 달리 사람들 속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 전하겠다는
임무를 사명으로 삼았었다는 마더 데레사.
이 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다른 시대를 살았던 데레사 그리고 또 한 데레사.
그분들을 생각하게 된 일은 참 우연한 일이였다.
집에서 늘 앉고 쓰는 의자의 다리가 자꾸만 흔들리고 불편하여 보니 연결된 부분의 이음새가 빠져있었다.
같은 것을 구하려고 철물점에 갔지만 맞는 꼭같은 것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리저리 헤메고 구해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전혀 연관성이 없어보이는 두 다른 데레사님의 일이 떠올랐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면서 또 두 데레사는 하느님안에서 깊은 연관성을 갖으며 결국 한분의 데레사 처럼 느껴질까?
그이들은 다른 사람이면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위하여 그 도구가 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각각의 지체가 하느님의 (온전성)으로 합쳐져 한몸을 이루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철물점에서 사갖고 온 것을 의자에 연결하니 이제 의자는 흔들거리지도 않고 내가 편하게 앉게 해 주었다.
하느님 그리고 그이의 도구여야 할 나.
포도나무이신 주인님 그리고 그 가지에 달려있어야 할 나.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과연 (나)는 하느님께 어떤 도구이며 어떤 일을 하며 또 할 수 있을까 ?
(나)는 조그만 새끼 발가락의 그 발톱의 한 쪽 끝도 아니면서 때로 가슴인척, 팔다리라도 되는 척, 심지어 때론 머리가 이닐까
그런 심한 오해로 나자신도 또 이웃에게도 상처를 주고 혼란에 빠뜨리지는 않는까 ?
(도구)로서의 사명, 소명은 그 사용자인 주인이 그 용도와 필요에 의해서 정해져 주어지는 것이고 도구는 다만 그에 따라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할 뿐이어야 한다.
그 알맞을 소명과 사명을 알아내는 일은 깊은 기도와 관상을 통하여 주인으로부터 오는 응답으로 일 것이다.
그런데 때론 정황으로 보아 주어진 일이 아닐 터인데 발이 손의 노릇 하려 하고 손이 발처럼 걸으려 하는 어색스런 모습도 보게된다.
또 주인으로부터 분명히 맡겨진 소명이 있어 보이는데 그일을 내려놓거나 외면한 것 같은 일도 보게되는데 그것은 주님께 직무파기, 직무유기가 아닐지 하는 의문도 갖게된다.
포도나무로부터 양분과 물을 받은 가지는 각 포도알에 그것을 전해주어야 건강한 수확으로 포도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그 길이 도중에 맥이 끊기면 포도는 차츰 마르고 병들어 고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 나 )는 오늘 밤, 고쳐진 의자에 앉아 나를 돌아본다.
나는 주인께 어떤 부품이며 어떤 도구가 되어 어떻게 쓰여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앉아있을까 ?
방금 사 온 눈에도 잘 뜨이지 못할 아주 조그만 것이면서 무슨 망치라도 된듯이 당치도 않게 이것도 두드려보고 저것도 괜히 툭툭 건드려서 그나마 성하던 것 조차 망가뜨리려 하고 있지는 않는걸 까 ?
아직도 확실치 않고 어리둥절해 있는 내모습을 보니 주제파악이 되지도 않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