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所有)
식은 밥이 있어 끓여 먹으면 맛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냄비에 물을 그득하게 채워 올려 놓았다.
한참 끓어야 먹기 좋게 되려니 하고 한 눈을 팔고 있는 동안에 요란한 소리가 나서
들여다 보니
오븐위로 온통 넘치고 흐르며 야단을 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뜨거운 냄비를 들려다가 떨구는 바람에
끓던 밥과 물은 나의 다리위를 덥치면서 화상을 입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황당하고 밥맛도 잃고 쓰라린 다리를 어루며 앉았다.
그 조그만 사고는 나에게 또 일감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밥 대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었으니.
* *
(분수)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이었다.
음식을 담는 그릇만이 아니다.
(주제파악) 이란 말이 있다.
자기 그릇의 크기를 잘못 알고 있거나 제 주제에 넘치는 일을 탐하고 더 많은 욕심에
지금의 처지를 만족하지 못한다.
여러 지체가 모이는
한 공동체안에서도 분수의 몰이해가 지체간의 불현화음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손이나 발이 머리가 되고자 하거나 머리는 다리가 되겠노라 화며
가슴더러 머리로 오르라 하여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 1코린12,12 )
사도 바오로께서 오래 전에 코린도교회를 두고 했던 염려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염려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어 보인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도 그와 같다고 사도는 일러 주고 있다.
”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 1코린12 )
각자의 그릇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달란트도 다를 터인데 잘 알아내어 그 것에 충실하여야 하지만 그 일 대신에 남의 밥상에 감을 놓아라 대추를 놓아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공연한 일로 화를 자초하기도 할 것이다.
(무소유)
평생 무소유의 철학을 말하던 한 고명한 스님이 입적하자
그의 철학은 온나라의 화젯거리가 되고 그래서 한동안은 모두의 입에서
” 무소유 ! ” ” 무소유 ! “하는 소리들이 요란해지는 바람에 많은 부자들이 전재산을
헌납하고 모두 절로 출가하여 불공을 드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되어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숨 죽여 그 귀추를 기다려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시끄러웠던 무소유 추종자들은 이내 조용하지고,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던” 부자청년 (마태19,16) 처럼
이전의 얼굴이 되어 늘 해 왔던 그들의 일상으로 되돌아 가고 말았다.
그리고나서는
그렇게 하고 만 일이 마음 한 구석에 걸렸었던지
그네들 중 일부는 되돌아 앉아 그 스님의 무소유철학을 오징어처럼 씹어대고 있었다.
“그 스님의 철학은 말짱 공념불일 뿐이야.
그는 입으로는 무소유를 떠들며 실생활은 많은 돈을 써가며 호화판 세계 여행도 다니고 쓰고싶으면 얼마던지 쓸 돈도 소유했고… 그러면서 우리보고는 무소유라고?
한마디로 웃길 웃자 아니고 뭐야? “
조금은 사실일지도, 또 중상모략의 험담일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간에,
우리는 흔히 (소유), (무소유)의 개념을 말할 때,
곧 (재물)을 떠올리게 되는 선입감을 갖는지도 모른다.
일차적으로 세상의 삶은 물질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고 또 육신의 눈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물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옷벗김을 당하시던 십자가의 길 제 10처에서
“십자가, 이것마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서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다.”고 하셨을 때
단순히 물질인 나무십자가를 지칭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소유하시므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만의 생각으로 무소유의 개념을 정리해도 된다면
(무소유)란 재물의 유무에 제한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그릇)을 완전히 비우는 것이 곧 무소유일 것이다.
곧 (마음)을 비우는 데에 무소유의 뜻이 숨어있을 것이다.
마음을 비우면 (나)는 곧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될 것이다.
(나)를 비우는 일은 곧 나를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물은 소유하고 있거나 없거나 마음을 비우는 데에는 사실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재물을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어도 나를 비우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되어진다면 그 재물은 언제나 내 마음안에 들어와 나의 주인이 되어 계신 주인님의 뜻에 좇아 쓰여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이
바로 예수께서 말슴하신 ‘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므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는 주님의 말씀의 진리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혼자 가늠해 본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지금 내가 재물을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없거나 하느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나) 자신으로 채워져 있다면 (나)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서 (무소유)의 개념과도 아무 상관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 *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노라니
새삼 화상을 당한 다리께가 쓰려오고 또 내 마음마저 쓰리고 두근댄다.
왜냐하면 ,
정작 나야말로 진짜 (무소유)자일지도 모른다는 두로운 생각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재물도 무소유일 뿐더러 마음도 비우려는 생각이 없어 과욕, 시기, 분노, 의심,등 온갖 세상의 것들로 꽉 채워 놓고 빈 틈이 없어 주님께서 들어서실 공간조차 소유하지 않았으므로 진짜 무소유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