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청년 이야기
미국은 자유의 나라 (The Land of Liberty)입니다. 자유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속함으로 얻게 되는 자유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석방되면 그는 속박에서 풀려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집을 잃은 아이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엄마의 품에 안긴다면 엄마에게 속함으로 자유를 살게 됩니다. 신앙 안에서 설명을 하자면 우리의 현실 안에서 주어지는 많은 속박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는 재물 혹은 명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질투, 이기심, 욕망 등은 참 자유를 위해 꼭 벗어나야 할 속박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참 자유를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분의 사랑의 계명에 속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역시 참 자유를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예수님께 부자청년이 찾아옵니다. 참 말씀을 찾아 떠난 기특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이 하느님보다 높고 귀해서 참 자유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물과 배를 버린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처럼 버려야 했었는데, 그 첫 번째 과제에서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물질의 풍요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참 자유를 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마련해 놓은 재물인데 펑펑 다 내어주고 오롯이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눈에 밟히는 올망졸망한 아이들, 눈에 보이는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물건 어찌 다 버리고 오롯이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오롯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저 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이면 족하지 우리 같은 평신도들이 어찌 언감생심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거 뭐야? 가톨릭신앙은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한 신앙인가? 그러면 종교를 바꿔야 하는 거 아니야?"하며 고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신앙은 가진 것을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를 가진 이가 부자이고 그렇지 못한 이는 부자가 아니라고 그 경계를 정해 주지도 않습니다. 어느 수준 이상의 부자는 ‘바늘귀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 처럼 구원 받을 수 없고, 어느 수준 이하의 재물을 가진 사람은 쉽게 구원 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재물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복음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품안에서 누리게 될) 자유를 얻기 위해 먼저 (자신이 가진 것, 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소유물들로 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집착합니다. 그 집착이 이웃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 집착이 우리를 힘들게 해도 그 집착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복권 당첨을 꿈꾸며 그저 한 번이라도 좋으니 원 없이 돈 좀 펑펑 썼으면 좋겠다는 희망 아닌 희망을 가지기도 합니다. 과연 물질 하나로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가난해서 불편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궁핍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어떤 일,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 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4,11-13).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분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재물은 하느님께서 우리게 내리시는 복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 잘못을 많이 저질러 복을 주시지 않고 벌을 주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해서 그들은 서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고, 예수님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협박을 하시는 하느님은 분명 아니십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선한 일을 하시지만, 선하지 못한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께 장사꾼의 마음으로 다가 섭니다. 한 것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나름대로 합리적이며 계산적인 장사꾼의 마음 말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우리 같은 장사꾼으로 만들어 그분께 예쁜 짓을 해야 하고 잘 지켜야 구원을 주시는 분쯤으로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구원에 집착한 나머지 선하신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잃는 아픔을 겪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이 보여주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이를 찾아보는 선한 실천을 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 5,16).라는 예수님의 분부를 기억하십니까?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한 실천을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 얼마를 교회에 내야하고 얼마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은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집착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살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아니 무엇이 우선인지 먼저 생각하라고 오늘 복음은 외치고 있습니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