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명
얼마나 많은 가수가 사랑을 주제로 노래를 불렀을까요? 그만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삶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과연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유행가 가사로부터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하는 신학적 해석까지 다양합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갈 것을 명하시고 당신 또한 그리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을 골고루 사랑하시는 분이시므로 원수도, 죄인도, 외국인도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그리 가르치시고 당신도 그리 실천 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지 따질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아울러 황금률을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해 주십시오.”(마태 7, 12 루까 6.31)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받은 계명을 확대 해석하여 613개의 율법 조문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248 개 조항은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입니다. 그래서 항상 613개의 율법 조문 중에서 어느것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것이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 이 예수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가 묻습니다.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명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말씀으로, 이 단 한 구절이 유대교 교리의 진수입니다. 이 구절을 ‘쉐마’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회당에서 예배를 시작할 때 항상 사용하는 말로서 유대교 유일신 신앙의 기초였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가죽으로 만든 작은 성구함 속에 넣고, 기도할 때에 이마나 손목에 붙이고 그 신조를 생각하였습니다. 이 쉐마 는
‘메주자’라는 원통형의 작은 상자에 넣어 출입문과 모든 방에 붙여놓고 하느님을 생각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첫 째 계명으로 인용했을 때에, 믿음 깊은 유대인들은 동의했을 것입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은 우리 신앙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이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나라의 영광을 주겠다고 사탄이 유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 6,24)" 하시며 단호히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또 재물에 관해서도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시며 한 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데 된다하시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 다" (마태 6,24)여기서 섬긴다는 말씀을 "사랑한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부귀영화든, 세속의 재물이든 무엇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은 이쪽을 더 사랑하고, 저 쪽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양쪽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은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향한 것 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양다리 걸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레위기 19장 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런데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이웃을 또 사랑하라 하시면 모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은 서로 다른 두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 방 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두 계명을 하나로 만드는 것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들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는 하느님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환언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서 증명된다는 말 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레위기에 나오는 이웃은 미워해도 되는 이방인들은 해당 되지 않고 유대인들만 해당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즉, 유대인들만 이웃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누가 이웃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내 몸을 사랑하고 내 마음을 사랑하고 내 생각을 사랑하고 내 목숨을 사랑하고 내 정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됨과 동시에 남은 또 다른 나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웃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남을 잊지 맙시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입술로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웃사랑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래서 하나입니다. 무엇이 먼저고 나중이 아니라 바로 하나의 계명입니다. 목숨 바쳐 사랑 하는 것, 죽도록 사랑하는 것. 말로는 쉽지만 행동으로는 어려운 이유가 바로 자기가 너무 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그것이 행동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사랑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