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깊은 펠리칸, 하느님의 어린 양

 

 

 

 

 

사랑 깊은 펠리칸, 하느님의 어린 양

 

혹시 펠리칸이란 새를 아시나요? 펠리칸이란 새는 엄청난 모성애를 자랑한다고 하는데, 새끼 먹이가 없을 때에는 자신의 가슴을 쪼아 그 피를 굶주린 새끼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펠리칸이 부리의 주머니를 비우기 위해 부리를 몸에다 대고 누르는 행동을 오인한 것입니다. 또 이새는 번식기에 주머니가 붉어지는데, 이를 보고 피로 오인한 것에서 유래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새는 종교, 예술, 문학계에서 피닉스(Phoenix)로 통합니다. 피닉스란 전설에 나오는 영조, 즉 불사조(不死鳥)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피닉스는 불멸 또는 재생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새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상상의 신조(神鳥: 그리스어로 Bynw)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상의 새 피닉스의 빛깔은 진홍색 및 금빛 깃털로 되어 있으며, 태양을 상징하는 태양의 새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태양이 아침에 되살아나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재생의 신앙과 불사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에 있는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은 새와 관계없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란 뜻으로 이애해야 합니다.

 

오늘은 연중 제 2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언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라고 소개합니다. 즉, 세상의 죄를 없애는 이가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유다 전통에서 죄를 없애는 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이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양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양이 아닌 사람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의 양은 자신을 믿는 이들에게 자신을 먹임으로써 그들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온 인류의 죄를 없애시는 대속적 죽음으로 여김으로 예수님을 신약의 "해방절 양"으로 상징하여 선포됩니다. 이 말씀은 고통 받는 "야훼의 종" (이사야 52:13-53:12)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의 죄를 대신해 죽임을 당하며,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을 신약의 어린 양에 빗대어 증언합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침묵하듯, 대신 희생당하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종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탈출기 12장의 제물이 된 양 역시 그렇습니다. 자신은 죽어 갔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파스카의 양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죄 없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하고 머물러 있음으로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한 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우리의 파스카 양”(1코린 5,7)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만 가득한 대속물이 횡행하는 세상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십니다. 백성의 회개뿐 아니라 당신과 세상의 만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게 보여주신 삶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죄인일지라 하더라도 주눅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에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기시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보복하시거나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적어도 성경을 통해 우리게 보여주신 예수님은 살리시고 고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꺼버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5,18-19). 요한복음은 우리가 세상을 거슬러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선택하게 합니다. (20,31 참조). 이 세상에 머물러 자기 죄를 씻는 데만 골몰하는 것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세상에 미련이 많다는 방증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 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라고 증언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을 ‘보고’ 그분이 누구인지 알았다고 합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요한은 예수 위에 성령이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는 회개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들여서 영적 인간으로 변화하고, 이로써 영적 인간을 알아본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영적 인간들은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 알아보고 뜻이 통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님 ‘위에 머무르십니다.’ 즉, 예수임께서는 늘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을 넘치게 받아들이며, 그 성령을 모든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베푸시는 분이시기에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합니다.

 

오랫동안 대속물을 바쳐 왔는데도 여전히 세상은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하느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씻어 내는 데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대속물의 자리를 자처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은 죄만 씻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죄를 없애고 하느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물로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내 죄가 사해진다는 생각은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자신이 깨끗해지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또 얼마나 웃기는 얘기며 오만한 자기 방어가 되겠습니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매 미사 때 마다 울려지는 거룩한 선포입니다. 우리게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초대 받음 자체도 복되지만 그 거룩함을 먹고 마시는 우리는 이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을 선포하며 살아갑시다.

김두진 바오로 신부

 

 

 

 

 

 

 

 

 

 

목록

'오늘의 미사' 게시판 최근 글 목록

제목
작성자
날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