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말씀, 신앙 이야기를 하면서 구태여 개인의 사생활 이야기를 하거나 그와 결부시키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결코 부끄러워 들어내기 조차 힘든 속내를 자랑인 양 말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고백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시점에 하느님의 말씀이 남에게가 아니고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되어 다가올때, 나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할 때, 나의 이야기는 궂이 나만의 것이 아니게 생각되었습니다.)
( 수면제 )
어느 때 부터였는지 나의 게으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나태함이 자꾸만 부담스런 짐이 되어 나의 양심으로 하여금
송곳처럼 되어 내 가슴을 코옥 코옥 찌르도록 하였습니다.
모태신앙인 이라는 것이 무슨 면죄권이라도 되는줄 알고 신앙인으로서 마냥 게으르게
늘어져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이웃은 말고라도 내 자신의 양심마저 그냥 더 이상 봐주기 어려운 지경이었던 모양입니다.
주일미사 안 거르고, 교무금 바치고, 합동고백성사 때 대충 걸러낸 죄목만 사제앞에
무릎 꿇어 고해 바치고 그리고는 매 미사 때마다 이웃들 틈에 줄에 끼어 나가 사제가
‘ 그리스도의 몸 ‘ 하며 나누어 주는 빵을 받아 먹고..
그렇게 하며 지내면 그리스도 신앙인의 모습은 대충 그럭 저럭 갖추고 살아가는 것이라 자위하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꼴에 스스로 지겨워진 나의 양심이 나에게 ‘ 정신 좀 차리라 ! ‘고 가슴을 두그려 왔던 것 같습니다.
자신도 그렇게만 살아서는 안되는데 늘 마음에 집히면서도 나태가 숩관이 되어
‘ 오늘은 기왕 지났으니 내일부터 조금씩 변하면 돼지.. ‘
그러고는 내일은 또 오늘의 반복이 되어 이어지고 있은 셈이지요.
그래서 작심을 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 서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느님께 다가 가는 길은 우선 그 분을 아는데에 있었습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을 아는데서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그날부터 성경을 잠자는 머릿맡에 놓았습니다.
낮에는 아무래도 어떤 구실로라도 성경과 가까이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잠들기 전에라도 삽십분, 한 시간씩 읽기 시작하려는 속셈이었지요.
그렇게라도 하려는 제가 스스로 대견하고 기특하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실행이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아마도 창세기 제 일장을 수백번을 읽었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러면서 분명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지요.
그저 잠자리에서 읽는 성경은 둘도 없는 최고의 (수면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단 오분안에 잠에 떨어지기 때문에 수백번을 반복해도 창세기 제 일장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 말씀 )
그래서 성경공부반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노예 근성이 있는 나같은 사람에겐 약간의 강제성이 약이 됩니다.
진도가 나아 가고 숙제도 주어지니 언제나 제 일장에 머무를 방법이 없지요.
진도는 나가고 묵상도 하며 숙제를 하라는 당부는 마음을 아직 열지 않고 그저 형식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에게 큰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성경공부반에 머물러 있는 한 그런 마음으로 있으면 날이 갈수록 짐은 눈덩이처럼 자꾸 불어나 감당하기 어렵게 될테지요.
그런 상황을 벗어나고 따라가려면 도리없이 눈을 열고, 귀도 열고,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길 뿐이었습니다.
가르쳐 주신 수녀님을 따라 Lectio Divina 를 하는 일이 내 마음을 하느님을 향하여 열어주고 내가 가야할 길을 안내하여 주고 있었습니다.
읽고(Lectio),
묵상하고(Menditatio),
음미하며 기도하고(Ruminatio & Oratio),
관상하는(Contemlatio)
과정을 마치 물이 흐르듯이 연결하면서 하느님을 초대하겨 만나게 된다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그에 따라 하는듯이 보이지만 실은 그 길은 배웠으되 그래서 여기 소개하는 것일뿐 정말 실행은 잘 안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고 또 재미있기도 하면서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는지 알쏭 달쏭 그렇게 지나던 어느 날.
하느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도 아니고 바로 나에게 하시려고 여기에 적어 놓으셨구나
무릎을 치며 감동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때가 저에게 있었습니다.
( 길 이시며, 진리시며 생명이신 분 )
그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 서를 통한 말씀 말입니다.
” 나의 형제 여러분.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십기오.”
그 때에 나는 일생 일대의 위기라고 할 수 있을만큼 어려운 일을 만나고 그에 빠져 있었습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하느님께 너무 불경스런 짓이었지만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왜 더 살아가야 하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매일 밤 잠 들기 전에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지 말았으면 오직 그것만 바라며 누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나의 못난 소망을 들어주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일 또 그렇게 바라며 제 마음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쓰레기같은 삶을 이십년을 이어가고 있었지요.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니라고 나의 어머니가 가르쳐 주었지만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못난이처럼 하루종일 울면서 지냈습니다. 차 타고 가면서도 울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울고 밥을 먹다가도 울고..
그 때가 창세기 제 일장을 반복해 읽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성당에는 혹시라도 이 잘난 부끄러운 모습이라도 교우들에게 듵킬까 싶어 숨긴다고 가지도 못하고 동네 성당에서 주일미사의 의무? 를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교우들 눈에 뜨이지도 않고 제 일장을 벗어 날 좋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성경공부반은 밤에 하고 그렇게 많은 교우들이 모아는 것도 아니고 그 분들은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안도가 되었습니다.
어렵게 알아보니 마침 성경반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심을 하고는 슬그머니 진행하고 있는 반에 들어섰습니다.
과연 아무도 날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어쩐지 아주 불편스럽게 느깨졌습니다.
웬 낯 선 자가 그것도 이미 한참 진행된 반에 불쑥 들어와 앉아 한 몫 끼니 수녀님도 모든 이들도 아주 어색한 모양이었습니다.
속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 아, 아무래도 내가 잘못 왔을까? 나의 착각이었나? 오늘만 오고 말아야 하나?
나는 상관없다 치고라도 이웃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인가? ‘
집으로 돌아와 온갖 생각과 망설임 끝에 그래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라도 계속 가기로 했습니다. 그 날부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참 잘 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나는 완전히 폐인이 되었거나 어느 정신병동에 갇혀 사는 신세로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 곳이 나를 살려 주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만나주십사고 청했는지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두드려 주셨는지 어쩌면 동시에 이루어 졌는지 그곳에서 그 분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분은 내가 배우는 성경책 그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마주하시고 나에게 말씁하고 계셨습니다.
”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잊었느냐? ” 그렇게 나를 어루 만져주셨습니다.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정말, 정말 나에게만 말씀하시려고 적어 놓으셨습니다.
이렇듯이 그 말씀이 나의 것으로 다가 올 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생명환)입니다.
(생명환)
왜 야고보서가 환난을 만나거든 기뻐하라고 했을까?
이제는 조금이지만 내 눈이 밝아져 알 것 같습니다.
정말 살고싶지 않을만큼 힘들었을 그 삶들의 체험이 나를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 가 만나는 일보다 더 큰 축복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축복이고 은총이 되어 돌아왔으니 기쁨이고 행복이 아닙니까?
“이제는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슬퍼하였기 따문이 아니라 슬퍼하여 마침내 회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현세적, 세상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
하느님의 비밀이 숨겨있는 보석같은 말씀이라는 생각입니다. (2코린 7.8)
그러구 보니 살아가면서 혹시 나에게 힘든 고비를 만들어준 이가 있었더라도 어쩌면 바로 그이가 나의 은인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적인 생각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이로 하여금 내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 동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의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 하셨을까요?
많은 이들이 고통을 만나 슬픔에 빠지면 분노와 원망에 빠지고 술과 도박, 마약등에 의존하여 잠시 그 환경을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함을 봅니다.
그것이 현세적 슬픔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난을 피하려 하지말고 슬기롭게 이겨내면 반드시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오로 사도가 전해주는 복음일 것입니다.
어두운 밤을 이기면 동녁은 밝아 오고야 말 것입니다.
오늘이 마침 그 말씀을 주시는 이,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신 아기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함께 축하하며 기뻐합니다.
” Merry Christmas to you, Everybody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