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주일에
성소란 '거룩한 부르심' 즉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불림을 받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들이 믿고 있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가 기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부르심에는 높고 낮음도, 좋고 나쁨도 없습니다. 사제 없는 교회도 생각하기 어렵지만, 신자 없는 교회는 더욱 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지만 동질은 아닙니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지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지만 동질이 아니기에 같은 인격체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서로의 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신자들과 사제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와 사제는 동등하지만 동질은 아닙니다. 물론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같지만 하는 일 때문에 따로 성별되어 축성되어지는 것이 사제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제는 존중 받아 마땅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신자들의 삶도 매우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삶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자 없는 교회 그리고 신자 없는 사제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존중의 이해에 각자 다른 견해가 있음도 인정해야합니다. 내가 신자들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사실은 받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존중의 이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늘 사람냄새 나는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저 높은 곳에 있는 사제의 상보다는 함께 웃고 울고 사는 편안한 아저씨, 친구, 동생, 형, 오빠, 그리고 다정한 이웃 같은 사제이고 싶었습니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신자들 앞에 사제의 권위를 내세워야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도 그저 편하게 웃으며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권위적인 사제는 싫다고 하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 이중성에서 혼란을 느낍니다. 물론 적당한 (사실 이 적당함이 제일 어려운 ‘중용’입니다.) 권위와 함께 사람냄새를 풍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한국 관구장님이 보내준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란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글 첫머리에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상이 어떠하든지 사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하느님께 향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삶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이어야한다. 다시 말해 신자들 마음에 드는 삶이 목적일수 없다’라는 말이 제게는 큰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내용을 보면, 1. 기도하는 사제,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제. 2. 미사전례를 신자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사제 3. 미사 중에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사제직의 중요한 요소이다. 응답자의 95%가 재미있고 알기 쉬운 말씀으로 선포하기를 바라고 있다.
4. 사제 혼자 독단적으로 재정이 결정되지 말아야 한다. 5. 사제의 개인생활에서는 개인적인 고유의 것은 보장해 주어야 함은 인정하면서도 신자들과 함께하기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과거에 성직자들이 멀리하여야만 했던 여성신자들 과의 관계에 대해서 오히려 신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폭넓은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응답자의 4.2%만이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오늘 복음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말하면서 목자인 사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목자와 양의 관계 설정을 싫어합니다. 성격상 목자와 양 즉 수직적 관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착한 목자의 근원은 자기 목숨을 바쳐 양들을 위하는데 있습니다. 삯꾼들은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기에 양들을 몰래 잡아먹거나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를 팔아먹는 도둑놈이었다는 것은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목자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해서 사제는 삯꾼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삯꾼이 된다면 교회를 팔아먹고 신자들의 등 처먹는 사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하고 신자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을 각오로 살아가는 것은 사제에겐 희생이 아니고 사제의 삶을 "기쁘게 하는 것" 이여야 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를 물러나왔다. (사도행전 5,41)
가정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삯꾼이 되면 이용해 먹으려고 눈치싸움을 하게 되고 또 자기의 이익만을 고집하게 됩니다. 삯꾼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을 하던지 대가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공부 잘하면, 00를 해준다, 당신이 이렇게 하니 내가 이렇게 한다, 내가 해주는 것에 반만 해줘도 이런 말 안 한다.”
많은 분들이 자녀들을 위해 미국에 와 이 고생을 하며 산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서라도 성소 개발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자녀들을 위해서라도 교회의 더 많은 일꾼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의 올바른 영성을 위해서라도 가정에서부터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삯꾼이 아니라 목숨을 내 놓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사제로부터, 부모로부터 보여 져야 교회의 성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풍성한 미래를 설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소를 위한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부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성직자나 수도자의 많은 배출을 위해 삯꾼의 마음이 아닌 착한 목자의 마음 즉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기도하고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김두진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