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가 저지르는 죄

 

 

 

 

 

신부가 저지르는 죄

 

 

"신부님 오늘 강론 너무 좋았어요." 칭찬처럼 들리는 이 소리를 격려로 들어야 하지만 어떤 때는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은 사제로 살아가는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싶어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23, 3)

 

어떤 선배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로 그리스도의 삼중 직분, 곧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 참여하지만 사제는 특별히 그리스도가 맡기신 이 직분에 더욱 깊이 참여한다. 신부가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언직과 왕직의 충돌이다. 신자들한테 바른 소리를 해야 하고, 때로는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도 못 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 있나?’ 하며 고민한다. 그러면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직무유기이다. 내가 선포한 말씀을 다살지 못한다고 해서 예언직 수행에 소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그말은 들으라 했으니 사제들은 움츠러들지 말고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것이 예언직 수행이다. 따라서 사제가 복음 선포 뿐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때 그리스도 왕직의 성실한 수행이 될 것이다.”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돌이켜보면 그 말씀을 살아내려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지 않나 싶습니다.

 

지난 몇 주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 (21,12-17) 대제관과 율사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어서 대제관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논쟁을 하시며 그들을 단죄하셨습니다. (21, 23-22,14) 특히 22,15-46에서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과 네 차례 논쟁을 벌이시고 적수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23장에서는 복음서를 집필하던 당시 (80년경) 유대교를 이끌던 바리사이 율사들과 최후 격전을 벌여 가차 없이 유다교를 단죄하실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최고회의에서 진술하실 때까지 그들을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 복음 23장 은 유다교와의 투쟁(21,12-22,46)을 결론짓는 유다교 단죄설교이며 종말 심판설교의 시작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만 앞세우고 실행하지 않는 것”(3)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게하며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 하십니다. 잘 보일 수 있게 성구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다니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한다고 하십니다. 성구갑은 성경구절을 넣을 수 있는 작은 양피지 상자를 말합니다. 바리사이 중 어떤 이들은 항상 또 어떤 이들은 기도 할 때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습니다. 이마에 묶는 것은 머리로는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 윗부분에 묶는 것은 왼팔 윗부분이 맞 닿는 곳이 심장이기에 마음으로 율법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행동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남에게 대접 받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과 10절에서 마태오교회에서는 아버지와 선생 존칭을 금기시했습니다. 아버지 존칭을 쓰지말라고 했음에도 교회 안에는 유독 금지된 아버지 존칭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교부, 사부, 신부, 대부, 등등… 어느 신학자는 존칭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놓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칭호도 없습니다. '신부형제'가 좋을까요? 아니면 사제(priest)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까요?

우리끼리 그냥 신부(神父)는 아버지란 의미와는 별도로 하나의 호칭이었으면 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2)라고 말씀하시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함을 단죄하십니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로 위선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눈먼 행동은 ‘마음의 교만’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 지성이 더 중요하고 나은것으로 생각하며 그로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가르치고 돌봐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끄는 대신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만 추구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행동을 ‘위선’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런 ‘위선’을 질책하신 것은 자신의 경건함과 의로움을 다른 사람 앞에 과시하려고만 했기 때문이었습니 다. 이처럼 그들의 겉이 화려한 만큼 보이지 않는 그들의 속내엔 '위선'이 가득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 ‘비천한 이들’ 입니다. 우리가 저녁기도 때마다 바치는 ‘성모찬송'의 기도문을 보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48)라며 겸손을 기도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겸손은 집회서의 “자존심을 가지되 겸손하고 너 자신을 평가하되 정당하게 하여라.”는 말씀(집회서10,28)처럼, 자신을 낮추어 비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자이며, 하 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의 눈은 늘 위에 있는 것과 높은 곳을 쳐다보려는 속성(?) 때문에 낮은 곳에 있는 이웃을 눈여겨보며 관용하게 도와주기를 힘들어 하나 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스스로 낮추는 사람을 높이시고, 스스로 높이는 사람을 낮추시는 분이시라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버지라 불리지 말라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는데도 아버지 (Father-신부)라 불리는 호칭적 죄인(?)인 제가 하는 말씀은 다 실행하고 지키십시오. 하지만 내가 하는 행실은 따라하지 마십시오. 행여 저의 개인적 약점으로 인해 옳지 않은 일을 한다면 무시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내치시고 겸손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다고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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