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문화와 함께 우리 곁에 온듯한 이 신조어는 아마도 악화(惡貨), Weed, 흙탕을 만드는 미꾸라지등 컴퓨터안의 남의 집을 무단 침입하여 해를 끼치는 해악의 총체적 의미가 아닌가 가늠해 본다.
바이러스, 박테리아,좀같은 것이 있고 해충도 있지만 광야의 야생 세계에서는 약자는 언제고 강자의 먹거리 대상으로 생존할 뿐이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논리속에서 먹고 먹히는 상황은 단지 생존의 방편일뿐 그 자체는 악도 선도 아닌 셈이다. 그들에게 무슨 영혼이 있어 남을 해칠 악한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카인의 후예)로 살아가는 사람의 사회에서도 (악)은 (선)과 공존한다.
(선)과 마찬가지로 (악)이 사람안에서 작용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 사람의 영혼속에 스며드는 것 일뿐 사람의 겉모습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세계의 생존논리와는 달리 사람은 먹고 사는 방편으로 남에게 해를 끼쳐야할 당위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주창조 엿새 째 되던 날 하느님이 사람을 지어 내셨던 그 순간부터 (악)도 함께 창조되었을까? 즉 사람의 악한 마음은 선천적일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사탄의 우두머리도 대천사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었으나 창조주에게 도전하고픈 사악한 마음이 들어 타락하였었고 카인도 동생에 대한 시샘으로 살인자가 되었었고 카리옷 사람 유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큰 은총을 은전 단 서른 냥에 저주받는 영혼으로 전락하였던 예들을 보더라도 우리 마음의 문을 나쁜 영에게 열어주어 들어오도록 나의 (의지)를 꺽을 때에만 악한 마음이 가능해짐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악플이 기승을 부리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우리가 (선한 마음)과 그 것을 지키려는 (의지)를 잃어버리고 (악플)이 활동하기 좋도록 환경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재능이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악플에 무릎꿇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생명을 스스로 저버리는 일을 연쇄적으로 도미노 현상처럼 보게된다.
참으로 기가 차고 안타까운 일이다.
촉망받던 젊은이들을 잃어서 안타깝고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이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내 물건같은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그들에게 진작 가르쳐주지 못한 우리들 (믿는 이)들이 그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는 일이 안타깝고 생명의 주 되시는 하느님앞에 부끄럽기 그지 없다.
악플은 세상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인 교회안에도 서슴없이 처들어와 활동한다. 마음들이 흐터져 있는 믿는 이들의 약점을 그들이 놓질 리가 없다.
좌충우돌, 그야말로 아무때나 아무데나 부닥트리고 흔들고 흐려놓으려한다.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악화는 양화를 몰아내는 일이 그 업이다.
독이 공기를 오염시키는 일을 멈춘다면 할 일을 잃는 것이 아닌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활동할 수있도록 (내 마음) 열어주는 데 있다.
내 마음만 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염되어 그들의 동조자가 되고 하수인이 되는 그 마음이 문제이다.
악플을 이기는 법은 그들에게 (이에는 이)로 맞서는 것일까?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예수님은 그 때가 되어 농부가 오시는 날 알곡과 가라지를 손수 가려서 나누시도록 그대로 두라 하신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고 보고있어야 한단 말인가?
(악플)을 이기는 방법은 내가 (할 일)을 계속 깨어서 하는 일이다.
(선한 이)는 악플에 전혀 영향을 받지 말고 나의 (선함)을 지키는 일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선을 지키는 일은 (하느님의 사람)처럼 매일의 일상에서 살아가는 일이다.
하느님의 사람처럼 사는 방법은 성경에 쓰였다.
(복음) 말씀에 쓰였다.
말씀을 다시 배우고 새겨 거듭나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선포하고 증거하고 그에 따라 살으라고 쓰여있다.
그대로 배우고 가슴안에 새겨 세상속에 섞여 그대로 사는 일이다.
성난 사자처럼 기승을 부리던 악플도 제가 있을 곳이 못된다는 것을 알면 내가 요청을 하지 아니하여도 제풀에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선한 이가 많아질수록 악한 자는 상대적으로 줄기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악플)을 이기는 쉽고 또 어려운 (비법)이다.
함께 그렇게 살았으면 정말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