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고 있는 아파트입구에는 작은 새장이 걸려있다.
그걸 알아차린지가 얼마되지도 않았다.
전에는 늘,
들락거리며 살았어도 그 새장을 올려다 볼 새가 어디 있었을까. 아마도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이 늘 그랬를 터였다.
그런걸 관심조차 언제 내맘속에 담을수 있었을까?
먹고 살 궁리한다는 구실로, 늘 하는 버릇처럼 그 잘난 개똥철학하느라 분주히 드나들면서도
새장은 커녕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게 언제 뭔 마음이 있어 인사라도 나누며 살았을까? 그랬던 것 같네.
지금이라고 생각이 났을까, 아니란다면 이제서야 철이 들었을까?
그랬었다. 그랬구나.
여기로 이사들어온지
어언 이십년만에야 겨우내 하얗게 빗바랜 얼굴에 썬탠도 겸할겸 현관앞에 마련된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아마도 따스한 엄마의 마음이 그리워졌던 것 같다.
이런 생각 저런생각… 그동안 살아온 지난 날 돌아보며 있었는데 처마밑에서 아까부터 뭣이 꿈지럭거리는 게 있어서 올려다 보니까, 아 ! 그곳에 생명이 꿈틀대고 있는 게 아닌가.
참새부부가 알을 낳아 어느새 부화된 아기들을 키우고있는 거였다.
정말이지 (졸고있던 내 영혼)이 깨어나며 감동의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만큼 나에겐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나는 매일처럼 그 자릴 차지하고 앉아 그 놀라운 광경을 이웃에게 빼앗길까 싶어 매일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이런 조금은 촌스러울 수도 있을 ,
하지만 여유있어보일수도 있을 제법 풍요로운 폼새를 한 채 올려다 보았었다.
그 언제 살기도 바쁜 내가 새생명이 움트는 놀라운 (창조주의 사업)에 마음을 쏟아보았을까.
진정코,
감동의 연속이고 그야말로 하나의 Spectacular이며 서사시였다. 시 한수라도 읊을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창조주 하느님 연출의 창세기를 보는듯 감동이었다.
새끼들은 먹이를 찾으러 떠난 ” 엄마아빠는 어디서 뭐하며 꿈지럭거리는 게야? ” 연신 조잘대며 찾고 있었다.
잠시 후에 ,
엄마가 달려와 차례로 입안에 모아둔 먹이를 나누어주고 아기새들을 안으로 마구 떠밀어대며 소릴지르고 있었다.
물론 사람귀엔 들리진 않았지만 ” 얘들아 위험해. 아직 날개쭉지가 덜 자랐는데 떨어지면 끝장이야. 알았어? “
아빠새와 어미새가 번갈아 열심히 먹이를 나르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모성애, 부성애가 아나면 무엇일까.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과연 이와같은 놀라운 사업이셨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때 창조사업 엿새째 되던 날에,
드디어 만물의 맞이인 우리들 (사람)을 지어내셨을 때 하느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셨을까?
이런 미물이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수 있을까? 다만 놀라울 뿐이다.
더말할 나위없이 “하느님을 꼭 닮아라, 그래야만 하느니라.” 하셨을 터였다.
내가 아직도 철이없었던 나는 늘 밖으로 나돌고만 있었다.
아빠엄마의 사랑이 없어서도 몰라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곱이나 되는 남매와 떠들썩했던 집안분위기도 부족했던지
그렇게 사람들이 좋기만 해서 사람들이 들끓는 밖으로 떠돌았던 것같다.
어쩌면 그당시 또 그 나이쯤된 아이들의 방랑벽이었겠지.
전쟁이 마악 끝이 났을 무렵이라 청소년들이 어디 마음을 붙일곳이 마땅치않았고 그래서 떠돌며 살았던 것 같다.
그땐 정말 우리들 아이들에겐 오락은 커녕 밖에 나와 마음을 기댈만한 게 지겹게도 없던 시절이었다.
구태여 오락이 있었다면 짜증나는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며) 분풀이하는 게 고작이었던 거같다.
어떻게 그런 패싸움이 스트레쓰를 날리는 유일한 도구였더란 말인가?
(전쟁),
그것은, 과연 잔인한 놀이였던 것이다.
나의 세대의 아이들은 그런 틈바구니에서 그렇게 그렇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유난스러웠던 것같았다. 도무지 집안에 있는 게 지옥같았던 걸까?
나는 유난히 방랑벽이 심했었다.
동네마다 넘처나던 불량학생들, 청년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더러는 어울리기도 했었다.
그네들 중엔 벌써 아주 가면 안되는 선을 넘어간 경우도 있었을 것이었다.
마음이 공허해서 떠돌던 내가 빠져들기 좋은 환경을 그네들이 보여주기도 했었을 것이고 그래서 위험천만이기도 했겠지.
그때마다 유혹이 나에게 손짓할 때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끄나플이 나의 등을 묶고 잡아다니는듯한
너무나 분명한 느낌이 나에게 더는 못가도록 (금단의 선)을 넘지는 못하도록 그런 작용을 해주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무엇일까?
어떤 힘인걸까? 그때마다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건 다름아닌 엄마의 (기도의 힘)이 분명했다.
(엄마아빠의 기도)는 이와같이 위대하다는 걸 늘 실감했다. 나는 결단코 어느 선을 넘어갈 수는 없도록 지켜주었다고 확신한다.
내자신이 (엄마아빠)가 된 지금 과연 나는 나의 (피붙이 자녀)들을 위해 그와같이 기도로 지켜주고 있었을까?
부끄럽게도 막연히 그랬긴 했겠지만 나의 부모처럼 열성도 적극적이지도 못했음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심히 부끄럽다.
여기서,
나를 내신 창조주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인간 어버이의 (그 사랑)과 비교가 될까?
분명히 절대적이신 하느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 !
우리는 과연 그분의 사랑을 넘치게 받아도 얼마만큼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고갤 들수가 없게 부끄럽기만 하다
자라면서 엄마아빠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성인이 된 다음 옆길로 접어들었던 자신의 불성실을 그이들에게 돌릴수는 없다.
자기자신이 책임 모두를 떠맡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할수있는 (의지)를 나에게 심어주시지 않았던가 ?
하느님마저도 어떻게 어른이 된 다음까지 그뒤를 쫕아다닐수 있겠는가?
모두 다, ” 내탓이고 내탓이며 또 내탓 ” 일 뿐이다.
어버이이신 하느님과 인간사이에서 낮에도 밤에도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잘되기를 바라시는
(기도의 어머니), (성모님의 사랑)을 내가 안보이고 못느낀다고 해서,
그 참사랑을 ” 나는 받아본 일도 만난 일도 없다 ” 고 말할수 있는가?
아파트입구에 달린 작은 새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등동물인 (새들의 엄청난 자식사랑) 을 보면서
새삼스레 감동한 이유를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기억합시다. Let us remember this.
” Love one another.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 너의 이웃에게도 그와같이 하여라.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