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보라!

 

 

 

 

 

와서 보라!

 

 

오래전에 어느 꼬마 친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 니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인지라 별 필요가 없는지 고개만 갸우뚱 하던 아이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던 생각이 납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만 하더라도 좋겠습니다.

 

오늘은 연중 2주일입니다. 성탄의 축제 기간도 지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제자를 부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첫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영혼을 준비시켰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될 “자기 제자 두 사람”(요한 1,35)을 예수님께 소개 합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1,37) 예수님을 ‘따르다’ 라는 말은 오늘 본문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 됩니다. (37.38. 40절)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온 인류의 죄를 치워 없애는 대속적 죽음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신약의 "해방절 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허락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야훼의 종”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벌을 받는 인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을 암시합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기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7).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해방절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유대인들은 해방절날 어린 양(탈출 12장 참조)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했고, 가족들과 함께 잡은 양을 나눠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진 ‘야훼의 종’과 같고, 우리를 위해 해방절에 성전에서 피를 흘리는 ‘어린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 45)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또 세상의 죄를 없앤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일회적이고 보편적인 속죄행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하고 머물러 있음으로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찾느냐?”(1,38)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십니다. 또한 나(예수님)와 함께 머무르고 싶은지 물으십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동문서답 같지만, 이 질문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의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분을 라삐라 부른 것 자체가 무엇인가 듣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머물고 싶은 이유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실 분' (4,14), 베드로처럼 ‘영원한 생명의 말씀’(6,68)을 주실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간단히 “와서 보라.” (1,39) 고만 하십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에게 ‘오다’ 라는 것은 신앙을 묘사하는데 쓰입니다. 그분에게 ‘오는’ 사람은 빛(3,21), 생명(5,40), 결코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6,35), 영원히 목마 르지 않을 성령(7,37)을 얻습니다.

분께 오는 사람은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다’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보다’ 라는 말도 신앙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이 말씀은 나타나엘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50절, 52절)과 같은 맥락으로 어떤 약속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보는 사람은 그분을 믿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6,40)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는 말씀으로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동문서답 같은 질문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듣고 보려는 뜻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즉 그들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들은 '하느님의 어린 양'께 오게 되고,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서 보고 그분과 함께 머물렀던 안드레아는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감으로써 ‘와서 보라.’고 초대하는 일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사명임을 알려줍니다. (1,41) 예수님은 시몬을 ‘눈여겨 보시고’ 바위를 뜻하는 ‘케파(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42) 복음서 안에서 자신을 ‘사랑받는 제자’ 라고 종종 소개하던 요한은 자신을 눈여겨보았던 예수님의 깊은 시선을 잊지 못했나 봅니다. 그는 자신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에서 죽음까지 함께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곁에서 그분과 함께 머물면서, 그분의 사랑의 눈길을 받으며(기도) 그분에 대한 내적 지식을 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실의와 절망에 빠진 이들과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불행이 죄에 대한 벌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웃을 고치고 돕고 살리는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십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가 상상하는, 두려운 하느님을 버리고,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신 일, 곧 고치고 돕고 살리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성령이 살아계시고 함께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게 무엇을 찾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께 찾고 싶은 원의를 말씀드릴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서두의 이야기처럼 찾고 싶어도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몰라 고개만 갸우뚱 거리는 우리의 부유와 게으름이 우리를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