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먼저 떠나신 거룩한 영혼들과 함께

 

 

 

 

 

우리보다 먼저 떠나신 거룩한 영혼들과 함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싸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무서운 것이 이념의 대립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도 보수주의니, 혹은 진보주의니 하며 싸우는 정치인들은 물론 전쟁이 끝 난지 60년이 넘었지만 빨갱이 운운하며 헐뜯는 모습을 볼라치면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또 하나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종교와 신앙의 싸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일 무서운 싸움은 이념과 종교가 합쳐진 싸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살테러로 목숨까지 버리는 이 엄청난 폭력 앞에 세상은 얼마나 힘들어 하며 경악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부활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율법을 앞세운 바리사이들과 현실의 삶만 인정하여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의 이념과 종교적 싸움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들려집니다. 주로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던 사두가이파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제가 사두가이였던 것은 아닙니다. 지방의 사제들은 오히려 바리사이에 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주로 예루살렘의 귀족 계층에 속한 사제들이었습니다. 교리적인 면에서 바라사이와는 달리 바리사이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구전전승을 거부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기득권을 보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들은 기반을 잃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되 된 1세기 이후에 다시 재건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사제 계층이 다시 일어 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부활에 대해 이의를 제기 합니다. 형이 자식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고대 중동 사회에 널리 보급된 제도였습니다. 이는 구약성서 신명기에서 그것을 제도화 하고 있습니다 (25, 5-10 참조). 이 제도는 형의 대를 이어 준다는 뜻으로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여성을 혼자 떠돌게 하지 않고, 남편의 부족 안에 머물게 하여 보호하자는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가이의 주장은 싸우려 작정하고 트집 잡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혹시 형제 중 하나 나 둘 정도가 일찍 죽어 형수를 모실 수 있겠지만, 일곱 형제 모두가 형수와 살 수 있다는 비유는 그저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들의 트집일 뿐 현실감이 전혀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니고 ‘깨달음’입니다. ‘건전한 상식’ 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세상의 ‘인연’과 ‘삶의 흔적’이 저 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적인 일임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여 간단한 것을 어렵게 꼬아 생각하는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세상의 질서가 소개됩니다. 사두가이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내세를 설명하려 했지만, 새로운 질서 안에서 신비로운 대답이 들려집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이신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으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는 죽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부활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 이들에게 그들의 역사 안에 살아 있던 이들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여전히 살아있다는 설명입니다. 현재의 삶이 전부인 사두가이들에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해온 그들에게, 부활은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두가이들이 근거로 하는 모세를 인용하여 성경이 부활을 말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만을 믿음의 근거로 삼았는데, 부활을 부정한 것은 모세오경에서 부활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는 성경해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이 모세를 인용하면서 죽음 이후의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모세에게 하느님 스스로 계시하신 당신 이름, “아브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탈출 3, 6)은 계약의 하느님이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은 항상 당신 편에서 먼저 나서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두가이의 믿음대로 사람의 인생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사람이 죽는 순간 하느님이 당신 기억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버리신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죽은 순간 하느님은 더 이상 그들의 하느님이 아니시게 됩니다. 그들 사두가이파 사람 스스로 계약을 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자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이라고 불렀는데, 하느님이 당신을 믿는 사람들과 살든지 죽든지 계속 관계를 가지시고 도와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은 세 족장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당신 생명의 충만함으로 부르시는 분, 살아 있든지 죽든지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분, 생명의 아버지이자 부활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위령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으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우리의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매 미사 때 마다 고백합니다.

 

우리게 이토록 좋은 삶을 주셨고, 부활하여 하느님 나라에 계신 우리보다 먼저 가신 이름 없는 성인성녀들과 통공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떠나 하늘에 계신 거룩한 이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김 두진(바오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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