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과 죄인의 뒤바뀜
오늘 아침에 묵상하면서 그전에 어릴 적 친구들과 티격태격 다투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티격태격하며 눈물을 흘리고 코피 터지며 싸우던 생각들이 부끄러웠지만 추억이라 싶어 미소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싸움은 며칠 지나면 잊어버리고 언제 그랬나는 듯이 서로 웃고 떠들어 대는 싸움인데 비해 어른들의 싸움은 무척이나 심각하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는 생각에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어른이 되어버린 내 자신이 아직도 티격태격 불필요한 싸움을 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싸우는 이유가 자존심에 관련된 것이라면 유치하리만치 조그마한 일에도 발끈하고, 싸우며 상처받고 아파합니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어린아이의 유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 한심한 마음에 부끄러웠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짐짓 자기들의 옳음을 앞 세워 레위라는 세리 집에 함께 어울린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을 탓하며 왜 죄인들과 어울리느냐고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파격적이리만치 통쾌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 말씀으로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지 명확해 진 것이 아닐까요? 이 말씀으로 누가 그분 곁에 있게 되고 누가 그분을 배척하게 되는지 확실해지지 않았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사명은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인과 함께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지금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묵상이 됩니다. 나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해 죄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고 있다면 나는 그분과 함께 머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많은 이들이 서로를 불목하며 지냅니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며 서로에게 손가락질 하며 네가 그르다하며 소리 높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런 꼴 저런 꼴 보기 싫다며 교회를 떠나고 교회 밖 사람들은 “왜 교회에 저렇게 죄인들이 많은가?”하고 교회와 교인들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복음 말씀을 잘 들으면 죄인들에겐 희망의 말씀이 됩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죄인들인 우리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모여야 합니다. 죄인들이 교회에 모여 시끄럽고 갈라서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죄인인 우리가 새롭게 시작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죄에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데, 그 길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의 생각에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으로 마음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완벽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안 하는 잘못을 내가 저지르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저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삿대질하고 윽박지른다면 내가 잘못하는 순간 나도 다른 사람에게 똑 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해서 죄인들이 모이는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감싸 안아야 합니다. 해서 용서는 위에서 아래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잘못을 용서 받기 위해 감싸 안는 평등의 나눔일 수도 있겠습니다. 나 스스로가 의인이라 생각하는 죄인이라면 세리들과 어울려 웃고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을 탓하며 마음 끓이며 살겠지만, 나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된다면 오늘 세리와 함께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는 예수님과 함께 나도 웃고 먹고 마시고 떠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슬며시 레위라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의인이 기도 안에서 부러웠습니다.
-Fr. 김두진(바오로)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