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 ( 理判事判 )



 

”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 ? “ ( 요한 6:68 )

 

죽는 그 시간까지 하느님 이시고, 주님 이시며 또 스승 이신 예수님을 따르겠노라며

지금의 용어로는 종신서원 까지 하며 맹세하였던 제자들이었는데 

막상 따라다니다 보니 지금처럼 지붕도 있고 때에 따라 냉난방도 들어오며 따뜻한 음식이 있는 사제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정의 집 처럼 공동으로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승님 스스로가 집 한 칸도 없으시고 철이 바뀌어도 늘 똑같은 옷 한 벌에 샌달 하나에 의지하여 산이나 들을 지나 

이 고장, 저 마을을 다니시며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모여들면 그 자리에서 가르치시다가 날이 저물면 

때로는 산에서, 또는 들판에서도 이슬을 그냥 맞으시면서 잠시 피곤해지신 몸을 쉬시거나 그도 아니면 기도하시는 가운데

밤을 밝히시기도 하는 선교활동.

 

어쩌다 

그 고장의 세리나 주님을 마음으로 섬기는 이가 식사라도 마련하고는 

예수님 일행을 오십사고 초대라도 하는 날이 아니라면 길을 걷다가 시장끼를 느끼는 제자들이 논에서 생 벼이삭을 식사처럼 

대용하지만 그나마도 바리사이들에게는 트집꺼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고달픈 주님을 따르는 삶.

 

어디 그 뿐인가.

 

늘 어려운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은  

때로는 알아들을 것도 같고 헷갈리기도 하여 어렵고 힘 들기만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따라다녀도 

더러 가족들에게 던져주고 나올 월급이나 생활보조금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오히려 눈을 시퍼렇게 뜨고 핍박하는 부유하고 세도 좋은 바리사이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고 칼을 찬 힘 좋은 로마병정들 에겐

언제 어디서 봉면을 당할지 늘 불안하기만 한 제자되는 길.

 

그래서

많은 제자들은 슬그머니 주님의 곁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에

주님께서 손수 뽑으셨던 열두 제자들 마저 마음이 흔들리려는 기미를 보시고는 그들에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 ? “

 

그렇게 물으셔야 했던 예수님은 얼마나 참담하고 애처럽고 서글프셨을까 헤아려 봅니다.

 

 

                                                                                                         *   *

 

 

005.jpg  

                

 

 

 

개인적인 얘기이지만,

하늘에 비행기가 나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거의 자동적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며 그 비행기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 까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자신도 참 의아스럽고 지금 같은 시대에 날으는  비행기를 번번이 올려다 보다니 정말 남에게 큰 흉꺼리 되기 십상이지요.

 

한번은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늘 가고 싶은 데가 하도 많은 데 사정은 허락하지 못하니 아마 그렇게라도 하면서 남들이 타고 가는 것을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하려는 욕망이 그런 습관을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날도 역시 맑은 하늘에 한 비행기가 흰 연기를 뒤로 뿜으며 날고 있었습니다.

 

저 안에 탄 이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떤 이는 오랫동안 떨어져 생활하던 차에 모처럼 가족을 만나러 가는 반가울 여행길에 있을 것이고,

또 어떤이는 가족들 곁에서 직장도 가까워서 좋았는데 갑자기 타지로 전근발령을 받게되어 가족들과 헤어져 떠나는

속 상하는 여행길에 있기도 할 것이라 짐작도 해 봅니다.

 

또 어떤 젊은이는,

오랫동안 이메일과 전화문자로만 사랑의 편지를 나누다가 혼인날자가 결정되어 신랑을 만나러 아니면 신부감을 만나러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렇게 하늘이나 올려다 보며 멍청한 공상에나 젖어 있다가 

불현듯 정신이 들며 제자들에게 물으시던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저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자꾸만 주님 곁을 떠나가려고 하고 있는 ( 나 ) 에게 묻고 계실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미사시간에 자꾸만 한자리씩 더 많이 빈 자리가 되어가는 교회를 들여다 보시며 속이 몹시 상하셔서 그렇게 묻고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해마다 문을 닫는 교회와 그 소속 학교가 늘어만 가는 현실을 내려다 보시며 

”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 ” 

그렇게 물으시며 서글퍼지신 마음에 아마도 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사순절이 돌아오면,

남은 이들은 모여 내핍생활도 하고 기도를 올리며 십자가의 기도행렬도 열심히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묻고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 너는 네 곁에 누가 앉아 있었으며 누가 너희 곁을 떠나 갔으며 그이가 무슨 연유로 그렇게 떠나야 했는지 알고 있는냐 ?

   아니면 알려고 한 적은 있느냐 ?  “

 

어쩌면,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시며 떠났거나  또는 떠나려 하고 있거나 그이들을 생각하시며 가슴을 태우실테지만 

또 남아있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벗어나 있고 세상의 가치를 그자리에 받아들이려 하거나 아니면 곁의 형제가 

그렇게 하여도 나만 아니라면 염려를 하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교회가 점차 흰종이에 검은 물감이 물들여가듯 해도

남의 일처럼 치부하려는 자세를 들여다 보시며 속 상해 하실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 ( 나 하나 만은 의인인척 ) 하는 어설픈 위선적인  공상에 빠져 있는 동안 비행기는 저만치 멀어져 갔습니다.

 

 

                                                                                                        ( 이판사판 )

 

불교를 장려하던 고려시대에 불교의 교세가 늘어나고 커지자 

왕과 그 주변 권력에 깊이 참여하여 세상의 정치행위에도 깊이 관여했던 불교는 세상이 뒤바뀌어 

이씨조선이 들어서고 그들이 이제는 유교를 숭상하며 불교를 못 마땅이 여기며 탄압까지 하게 되자 

어느날 갑자기 불교는 쫒겨야 하는 입장이 되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불당을 지키고 절을 지키려는 승려들이 있었는데 

우리 교회의 수도회처럼 주로 은둔자 생활을 하며 불공을 하고 기도에 전념하며 지키는 이들을 이판(理判) 이라 하였고

우리 교회의 교구처럼, 세상에 있는 사찰에 나아가 지내면서 세상의 일도 거들며 포교도 하며 또 일정한 수입도 얻는 이들을

사판(事判) 이라 하였는데  그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불교는 유지되고 계속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환경이 너무나 힘들고 말하자면 순교자적 희생이 따랐으므로 후세에 와서 그때를 회상하니

정말 세상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는 뜻으로, ” 에이, 어떻게 되든지 될 데로 되라고 한 번 해보자. ” 

아마 그런 의미로 이판사판 이란 말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웃의 불교 이야기 가 아니라 이 시대의 우리 가톨릭교회가 날로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심하게 받고 

또 교회 자체도 세상을 밝히고 정화시키는 능력 보다는 그 타락한 세상에 점차 몰리며 심지어 스스로 물들어 가는듯한 

현세태를 보며 왠지 그 이판사판 의 경우를 떠올리게 되는 일은 참으로 아이로니 같았습니다.

 

지금,

세상의 권력에 합류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 

그 자리에 머물고 싶고 그 세력에 반대하면 자리를 빼앗길까 염려되고 두려워 또 임명직이 아니라 표로 선출되는 자리는 

타락한 세상의 표들이 그네들에 반대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주장하면 반드시 다음에는 낙선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에 

그들을 포용하고 타협하며 ” 나는 너희들 편이다.” 하고는 주일에 미사에 와서는 ” 주여, 세상에 살려니 어쩔 수가 없나이다. “

그렇게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그들이 육신은 아직 교회를 떠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주님 곁을 떠났으며 교회를 들락거리며 남아있는 주님의 사람들 마저 

자꾸만 감언이설로 속이며 유혹하니 교회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가톨릭이 운영하고 있는 교육기관, 예를 들어 노틀담 같은 전통적인 가톨릭 학교 마저도 독자적인 교육행정을 한다며

바티칸의 지시마저 자주 거역한다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는 예라 할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보시는 전 교황께서 그네들과 싸워 성전을 정화하려 하니 그들은 오히려 반발하며 저항하고 나섰습니다.

그들 물든 세력과 대적하시려니 육신적으로 쇠약해지신 현실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제 큰 새력화된 검은 물로 무장한 세력들은 하느님의 교회를 넘나들며 

” 교회도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이니 현실로 받아들여라. ” 고 궤변을 합니다.

 

낙태, 동성혼인, 배고픈 이를 외면하는 일. 무력과 강압으로 사람의 기본인권을 침해하는 일…

 

이런 일을 현실이라며 동조하거나 묵인하거나 소극적으로 암묵하는 자세는 모두 위선이거나  배교적인 일이다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가름침에 위배하는 일이니까요..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타락을 염려하지만 

특히 이에 관하여 강조하며 우리를 일깨우려는 소리들,

 

마더 데레사,  요한 바오로 2 세 교황님, 베네딕토 16  세 교황님, 그리고 계속 이어서 오신 프란치스코 새 교황님 들을 

끊이지 않게 계속 세우시는 성령님의 숨은 뜻은 아마도 심각한 현세대를 얼마나 염려하고 계신가를 가늠하게 한다.                  

     

  이제

세상을 이기고 부활하여 우리 곁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날, 부활절을 바라며

우리 교회도 새로 태어나듯이 더욱 굳건한 모습이 되어 빛이되고 소금이 되어 세상을 정화시켰으면 하는 바램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 봅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