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한국 천주교회는 18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1784년 북경에서 영세한 첫 한국인 이승훈베드로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실천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매우 독특한 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부터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겪어야 했고 박해는 100년 이상 계속되어 만 명 이상의 신앙의 조상들이 순교 하였습니다. 초기 50년간에는 중국인 사제 두 분의 짧은 사목 활동이 있었을 뿐 1836년에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입국 할 때까지 사목자 없이 평신도들만으로 지하 교회가 운영 되었습니다. 선교 역사를 보면 가톨릭 신앙의 전파는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조선에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데, 이는 유학자들 중 성실한 실학파들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이루어 지게됩니다. 이들이 접한 인생의 참된 삶의 의미를 천주학을 통해 받아들임으로 선교사 없이 스스로 교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말씀 앞에는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22)가 있고, 그 뒤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고자 루카복음사가는 의도를 가지고 집필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23) 성경에서 ‘따라간다’는 것은 제자 됨, 곧 예수님의 삶과 사명과 운명을 따라 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렸지만 베드로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한탄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영어로 Get behind me, Satan. 즉 내 뒤로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 뒤에 서있어야 합니다.

 

이런 따름의 삶에서 제일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 '자신을 버리는 것'(23) 입니다. 어떤 재산 많은 청년이 주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8, 18)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8, 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 했지만 세상의 지위와 명예, 그에 따른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 재물에 대한 그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 8)라고 고백합니다. 누구를 따른다는 것의 가장 기본 조건은 그 따름을 방해하는 자기를 버리는 결단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음은 자신만이 아니라 지상 추구하는 가치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둘째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수행입니다.(23)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질 수밖에 없는 삶의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기껍게 고통을 인내 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는 모든 이에게 고통일 뿐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인생의 장애가 되기도 하고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거부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 실존에 따르는 필연적인 것이기에 극복할 수밖에 없는 과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받아 들여 묵묵히 지고 갈 때 십자가는 참된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 도구가 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다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며” (시편 1,2) 날마다 주어지는 자신의 십자가를 일상 안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내적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 문제 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각 사람의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듯 각자의 십자가는 크기도 모양도 무게도 다릅니다. 문제는 그 고통과 고생이 의미있는 고통인가, 무의미한 고통인가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고생이고, 직장생활도 고통의 연속 입니다. 사업을 해도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가장 무겁게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남을 위한 희생, 남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길에 핍박과 질병이라는 십자가가 놓여 있었지만, 그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 14) 라고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루카 9,24) 온전한 투신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는 부귀 ·권세· 명예·학벌·인맥·성공 등의 지상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명백한 목표를 제시하며 기쁨과 보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투신하게 되는 가치, 곧 자아 포기, 헌신 적인 십자가의 희생(23), 나눔(루카 18,22), 무한한 용서(마태 18,22), 이웃 사랑(루카 10,27. 29­37) 등은 신앙 안에서 빛을 발하며 보이지 않게 우리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우리게 무엇을 선택할지 묻고 있지만 우 리는 믿음 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코린 4,18)하다고….. “사람이 온 세상 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루카 9,25) 사도 바오로께서도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4)

 

이번 주일 오직 한마음으로 '그 목표'룰 향해 순교의 길을 달려가신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의 삶에도 세상의 가치, 세상의 잣대가 있었지만 보이는 모든 것을 당신들 뒤에 두고 당신들 앞에 주님을 모신 순교의 삶은 주님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자랑스런 순교자의 후예인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는 현대의 순교의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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