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달나라에 갔다 온 암스트롱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달에 가서 무얼 보고 왔는가?” 그가 대답합니다. “지구가 아름답다는 것을 보고 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그래서 바로 볼 수 없었던 지구, 지구가 아름답고 소중한
별이라는 걸 보기 위해서는 지구에서 나와 달나라까지 가서야 확연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연중 30주일인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
외칩니다. 거기엔 체면도 없었고,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그저 간절한 소망으로 외치는 소경의 믿음뿐이었습니다. 지구 안에서 지구를 보지 못하는 것 처럼 자기에게 갇혀
보지 못하던 그가 스스로 뛰쳐나와 체면과 부끄러움을 넘어 하느님의 자비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느님께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내 안에 갇혀 있고 내 편안함(Comfort Zone)에 머물기만 한다면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엔 많은 바램들이 있습니다.
그 바램들은 기도 하나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저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집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희망을
위해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열심이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자기의 욕심에 갇혀 있으면 진실을 볼수 없습니다. 그저 내 만족, 내 기쁨을 위해 남에게 강요된
요구만 있을 뿐입니다. 꾸준히 기도 안에서 울부짖어야겠지만 그렇게 울부짖는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동시에 조용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것이
가정을 바꾸고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첫 걸음일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의 간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그는 그전에 보았던 것들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전에 보았던 사랑하는 사람들, 멋 진 세상, 아름다움들…….
그는 다시 보고 싶어하는 것들을 보게 됨으로 기쁨을 찾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것 중에 우리가 지금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 멋진 세 상,
그 아름다움들을 왜 보지 못할까요? 나이가 먹어가는 배우자지만, 아름다움과 멋짐은 그대로일진대, 귀염둥이 아이들이 훌쩍 자라나기는 했지만, 사랑스런 모습은 그대로
일진대, 그 전보다 훨씬 나아진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왜 그전에 보았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눈뜬 소경이 되었을까요? 나이가 먹으면서 노안이 되어 잘 보지 못하는 것들은
글씨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보았던 아름다움도 함께 못보고 살아가나 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르티매오는 믿음으로 다시 보게 되는 것 뿐 아니라 구원을 살게 됩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놓치며,
무엇을 못보고 사는지를 아는 사람에게는 다시 보게해 달라는 청원이 있습니다. 그 청원의 기도로 다시 보게되고 구원의 기쁨을 살 수있게 된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갇혀
욕심에, 체면에, 권위에 눌려 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그분의 말씀처럼 얽매이지 않고 살게 됨은 구원의 기쁨이기에 그 삶은 축복된 삶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 아는 지식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보는 각도가 다르고, 이해의 폭이 다르며, 경험의 지식도
각기 다르기에 불화가 있고, 왜곡이 생기며, 싸움도 생깁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질서에 따라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받아들인 신앙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힘들게 살면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도대체 하느님이 내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며 시간도 재능도 그리고 노력도 봉헌할 이유가 없다며 늘 불평을 늘어놓으며 신앙 안에서 어둠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무엇을 보았기에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지금 무엇을 보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절망과 어둠에로 끌고가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요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갇혀 봤던 것을 볼 수 없게 된다면 구원도, 기쁨도 그저 신앙의 멍에로 다가올뿐 기쁘지도, 슬프지도 못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차지도 뜨겁지도 못할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우리가 살아낸 그 자유가 방종인지 자유를 위장한 폭력인지는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확연히 들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꾸중을 이겨내고 바르티매오가 외치고 간청했듯이,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간 우리가 지금 다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좁고 작았는지, 얼마나 닫힌 공간에서 오래 살았는지, 세상이 얼마나 크고 장엄한지, 우리가 그 크고 장엄한 세상에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만큼,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지, 우리가 왜 미래의 희망이 되는지, 우리가 무엇으로 다시 피어날 수 있는지………
갇힌 나에게서 빠져 나오면 눈물나게 환해지고 보여지는 것들 입니다.
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이는 것처럼 나에게서 나와야 내가 비로소 보입니다.
암스트롱이 지구를 떠나 지구를 본 것처럼 우리도 보지 못했던 것을 다시 보게 되도록 나에게서 뛰쳐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외쳐야 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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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