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착한 강도
선거철이 되면 많은 후보들은 공약을 세웁니다. 자기들이 국민으로 부터 위임 받은 권력(?)으로 세상을 바꿔보려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세상을 바꿔 보려고 했지만, 정치와 결탁하여 당리당략을 따르는 정치꾼으로 변하는 수는 너무 많습니다. 역대 대통령중 감옥에 안 간 사람이 더 적지 않나 싶을 정도가 된 현대사에서 권력의 힘으로 바꾸려는 것은 자기욕심이지 세상이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직도 보수와 진보라는 명문에 갇혀 옳은 일 보다는 반대를 위해 투쟁(?)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현대사를 보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세상을 망가뜨린 사람들은 오히려 권력가였고 위기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위기를 극복 해낸 사람들은 오히려 국민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실 예수님을 왕으로 표현하는 일은 끊임없이 우리 속내를 불편하게 합니다. 스스로 한 번도 자신을 왕으로 여겨본 적이 없는 분에게 그런 칭호를 막무가내로 붙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예수님은 산으로 피신하셨던 분이십니다. 하기에 그분은 진실로 왕이나 지배자이기를 거부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그분이 쓰신 왕관은 가시관이었고, 그분이 입으신 예복은 병사가 억지로 입힌 조롱의 자색 용포 같은 죄수복이었을 뿐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예수님 머리 위해 낙인찍힌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교황 비오 11세가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교리를 정리하셨습니다. (Quas Primas, 1925). 이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점 때문에 왕으로 모셔집니다.: (1)하느님의 아들로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2) 세상의 구원자시라는 점에서; (3) 판단의 기준을 세우셨으며, 심판자이시며, 그것의 집행자시라는 점에서(사도행전 10:42). 그분은 왕이 되신다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도 두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복음 말씀을 읽고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모욕함으로 신앙은 편할 수 있고 이익에 관계되어야만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요?"하며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만,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라고 말함으로 똑 같은 처지에서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즉, 믿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달라는 것인데 이는 예수님을 인생 해결사 정도로 본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복잡하게 얽키고 설킨 우리 인생사를 풀어주시는 해결사는 분명 아니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달린 다른 죄수는 자신을 올바로 인정할 줄 알았고, 책임은 바로 내가 져야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착한 강도는 자기 탓을 찾을 줄 아는 성숙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달려진 팻말 하나 밖에 없었지만, 신앙은 지식이 아니고 믿음이며 이 믿음을 뒷받침해 주는 행동이 있어야 함을 이미 알고 있었던 지혜로운 강도 였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행동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 나옵니다. 이해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틀려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있습니까? 약점도 잘만 보면 매력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고, 강점도 잘 못 보면 지겨움으로 변한다는 것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바로 이렇게 관점을 바꾸는 것 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으로 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
또 그 강도는 어떻게 예수님이 주님이란 사실을 알았습니까? 그는 바로 십자가위에서 함께 달리신 예수님이 구세주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도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낙원에도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통들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찾을 수 있어야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 -골로 1, 24
어떤 메시아를 우리는 원합니까? 어찌보면 구원의 가장 빠른 길은 십자가 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안에서 이미 형제가 되었거나 미래에 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랑에 가득 찬 고통을 자발적으로 당하기까지 합니다. (히브리 5, 7-9)
세상에 착한 강도가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착한 강도가 되고 싶고, 지혜로운 강도가 되고 싶습니다.
김두진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