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착한 강도
11월 19일에 시카고 대교구의 Blase Cupich 대주교께서 로마에서 추기경으로 서임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 축하드리고, 지혜로운 지도자로 교회의 목자로 살아가시도록 기도드립시다!
많은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또 권력자가 되어 세상을 바꿔 보려 하지만, 다른 힘 있는 자들이나 정치꾼들과 결탁하여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당리당략을 따르는 정치꾼으로 변하기 십상입니다. 혼자 살기에 외로워(?) 국가 기밀을 나눈 대통령도 있고, 또 그런 대통령을 이용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이들 때문에 한국은 시끄럽습니다.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국민들의 속마음을 읽기는 하는 건지, 또 분노하는 국민의 이름을 빙자해 자신의 정치 속셈을 드러내는 정치꾼들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는 있을지 의문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역사를 보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세상을 망가뜨린 사람들은 대부분이 권력가였습니다. 위기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극복해낸 사람들은 오히려 국민들이었습니다. 세상을 변하게 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올바른 시각과 정신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는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실 예수님을 왕으로 표현하는 일은 끊임없이 우리 속내를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한 번도 자신을 왕으로 여겨본 적이 없는 분에게 그런 칭호를 막무가내로 붙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예수님은 산으로 피신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분은 진실로 왕이나 지배자이기를 거부하신 분이십니다. 실제로 그분이 쓰신 왕관은 가시관이었고, 그분이 입으신 예복은 병사가 억지로 입힌 조롱의 자색 용포 같은 죄수복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분에게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예수님 머리 위에 낙인찍힌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 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도 두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복음 말씀을 읽고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달렸던 한 강도는 예수를 모욕함으로 신앙은 편할 수 있고 이익에 관계 되어야만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는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요?"하며 그 강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은 하지만,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라고 요구함으로 같은 처지에서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즉, 믿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달라는 것인데 이는 하느님은 복잡하게 얽키고 설킨 우리 인생사를 풀어주시는 해결사는 분명 아니심에도 예수님을 사건의 해결사로 본 가짜 신앙입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자신을 올바로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또한 책임은 바로 내가 져야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라고 고백한 착한 강도는 자기 탓을 찾을 줄 아는 성숙된 인간이었고 신앙은 지식이 아니고 믿음이며 이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행동이 있어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달려진 팻말 하나 밖에 없었지만, 그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지혜로운 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행동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 나옵니다. 또 이해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틀려집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 가는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약점도 보는 시각에 따라 매력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점도 잘못 보면 지겨움으로 변한다는 것도 체험으로 압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으로 보는 것.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
착한 강도는 어떻게 예수님이 주님이란 사실을 알았습니까? 그는 바로 십자가 위에서 쉽게 예수님이 구세주란 사실을 알게 된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착한 강도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 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낙원에도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통들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 24)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세상의 복잡한 일들이 저절로 풀려지거나 고통없는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감이 내 입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은 착한 강도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구원의 십자가 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안에서 이미 형제가 되었거나 미래에 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랑에 가득찬 고통을 자발적으로 당하기까지 하는 것"(히브리 5, 7-9)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로마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되신 Cupich 추기경님은 "우리 모두 우리의 안락함(Comfort Zone)에서 나와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힘은 약해 보이지만 강하다는 사실이 오늘 복음에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착한 강도가 있을까만, 저는 지혜로운 강도가 되고 싶습니다.
김 두진(바오로)신부